중국 주장 : 고조선은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漢四郡으로 이어지는 중국사이다.


중국학자 중 일부는 은(殷)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옛 진국(辰國)으로 이주해 조선을 세웠고 후에 주(周)로 가서 신하의 예를 표했으므로 조선은 주의 제후국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교체되며 한(漢)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四郡, 漢四郡)을 설치했으므로 고조선사는 중국사라고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문헌사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으로나 인정할 수 없다. 중국측 주장의 근거인 『상서대전(尙書大傳)은 한나라 때에 편찬된 사서(史書)로 그 이전 중국사서에는 기자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한 대(漢代)에 갑자기 기자조선설이 나오게 된 것은 시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나라를 세웠다면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요령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과 다른 고유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성격상으로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면 은(殷)·주(周)때의 청동예기 등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미송리식 토기·고인돌 같은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한 것은 우리 역사서에 나오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후에 중국 한나라 초 혼란을 피해 연(燕)나라에서 고조선 서쪽 변방으로 망명한 위만이 정권을 탈취해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다. 그런데 이 경우 고조선의 일부 지배층만 교체되었을 뿐 국가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래도 사용하고 우거왕(右渠王)때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역계경(歷谿卿), 니계상(尼谿相) 참(參) 등과 같이 조선인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고위직에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위만조선도 고조선에 포함되는 것이다.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신(新) 조선인 위만조선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조선을 고조선이라 칭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훗날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조선인 것도 우리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의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사군(四郡, 漢四郡): 기원전 108~107년 고조선 땅에 설치된 중국 한나라의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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