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란이 가져다준 왕위

 ⑴ 선조

  ① 아들 14명 : 정비 의인왕후 박씨 소생은 없었다.

  ② 서자중에서 세자 선택 : 자신이 방계 혈동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부담

  ③ 세자 책봉을 계속 연기

 ⑵ 1591년, 좌의정 정철(서인) : 가장 먼저 세자 문제 거론

  ①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등과 세자 문제에 대해 논의 : 광해군으로 결정

  ② 이산해(동인) : 선조가 인빈 김씨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인빈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하고 그 뒤 인빈과 신성군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고 말함

  ③ 정철의 주청

   ⓐ 선조의 진노로 화를 당함

   ⓑ 동인인 유성룡,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

 ⑶ 분조 : 비상 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

  ① 임진왜란으로 분조

  ②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

  ③ 신성군 : 이미 병사(病死)

  ④ 임해군(광해군 형, 장자) :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제외

 ⑷ 명의 고명(誥命)

  ① 명의 고명이 있어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

  ② 1594년, 윤근수를 명에 파견 :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

  ③ 신하 : 광해군의 최선을 다하는 분조 소임으로 그를 세자로 따름

 ⑸ 1606년, 인목왕후(선조의 계비)의 영창대군 출산

  ① 선조

   ⓐ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려고 생각

   ⓑ 유영경 등 몇몇 신하에게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고 말함

  ② 영창대군 지지파(소북파)와 광해군 지지파(대북파)로 분리

  ③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 광해군은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불인정

  ④ 1608년, 선조의 병 악화

   ⓐ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禪位敎書)를 내림

   ⓑ 영의정 유영경 : 이것을 발표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춤

   ⓒ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

   ⓓ 정인홍 : 유영경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나 선조는 결정을 못내리고 죽음

 ⑹ 광해군 즉위

  ① 왕위 계승 결정권은 인목대비가 보유

  ② 유영경 :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

  ③ 인목대비 :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 시킴

  ④ 1608년 2월 2일, 광해군 34세때 즉위


2. 왕권 안정 : 피바람

 ⑴ 유영경 유배, 사사

 ⑵ 임해군 유배, 사사

  ①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기 때문

  ② 임해군 : 왕위를 도둑맞았다면서 광해군을 노골적으로 비방하였기 때문에 대북파(집권파)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③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조선 조정과 광해군을 무시한 처사

 ⑶ 유생과의 불화

  ① 1611년, 대북파 거두 정인홍 :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 반대

  ② 성균관 유생 : 유생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 이름 삭제

  ③ 광해군 : 유생을 모두 성균관에서 축출

 ⑷ 1612년, ‘김직재의 옥’

  ① 소북파 인사 100여명 숙청

  ②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

  ③ 역모사건으로 결론

 ⑸ 1613년, ‘칠서의 옥’

  ①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 사사

  ②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킨 후 강화도에 유배

   ⓐ 위리안치 :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

   ⓑ 증살 : 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하는 것

   ③ 선조의 유명(遺命)을 받든 일곱 신하를 삭직

 ⑹ 1615년, 능창군(능인군 인조의 동생) 추대 사건(=신경희의 옥사)

  ① 소명국의 무고 : ‘그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

  ②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자살

  ③ 신경희 사형

  ④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 유배

 ⑺ 1617년, 폐모론(廢母論) 대두

  ① 폐모론 반대론자 유폐 :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

  ② 1618년,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덕수궁)에 유폐

   → 광해군과 대북파 :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하여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


3. 민생안정책

 ⑴ 1608년, 선혜청 설치,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하여 세구 부담 경감

 ⑵ 1611년, 양전 실시 : 경작지를 확대, 국가 재원 확보

  ① 농지 조사, 측량

  ② 작황(作況) 점검

 ⑶ 1608년, 창덕궁 준공, 1619년, 경덕궁(혹은 경희궁)과 1621년, 인경궁 중건

  ①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해 원성을 사기도 했으나 당시 상황으로선 불가피한 것

  ② 나라 일을 월산대군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


4. 실리적인 외교 정책

 ⑴ 여진족 세력, 후금(後金) 건국

  ① 대포 주조

  ② 박엽을 평양감사에, 정충신을 만포첨사에 임명 : 국방강화

 ⑵ 명의 원병 요청

  ① 강홍립, 1만 군사 동원

  ② 부차 싸움에서 명이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척하면서 후금에 투항 : 양면 외교

 ⑶ 강홍립 투항

  ① 박엽 : 강홍립의 가족을 모두 하옥

  ② 조정 대신 : 명을 배반하고 투항했기 때문에 역적으로 다스려야 하고 가족은 모두 주살해야한다고 주장

  ③ 광해군 : 대신의 주장을 무시하고 가족을 서울로 데려와 물품을 하사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조처

  ④ 투항은 광해군의 책략

  ⓐ 명에 대해선 협력하는 척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다.

  ⓑ 후금에 대해선 명의 강요 때문에 출병했을뿐 우호를 다지겠다.

  ⓒ 강홍립 : 광해군의 책략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로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냄 -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 방지

 ⑷ 왜와의 외교 정책

  ① 1609년, 왜와 송사약조(送使約條) 체결 : 임진왜란후 중단된 외교 다시 시작

  ②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왜에 파견

  ③ 임진왜란후 악화된 왜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 위험을 해소


5. 실리적인 정치

 ⑴ 도성을 파주의 교하로 옮길 것을 결정

  ① 정씨왕조설

   ⓐ 이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선다

   ⓑ 민심을 동요시키는 주된 요인

  ② 한성

   ⓐ 전란으로 완전히 소실

   ⓑ 복구 사업에 많은 재원과 인력이 필요

  ③ 교하 : 실리주의적인 판단으로 설정

   ⓐ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사정에 어려움이 없다.

   ⓑ 대평양에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쉽게 구할 수 있다.

   ⓒ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적당하다.

   ⓓ 군사적으로 보아도 한성보다 안전 : 한성보다 북쪽이라 왜의 위협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고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명, 후금)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제격

 ④ 명에 원군 파병 문제 및 여러 현안에 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안됨

 ⑤ 당시 상황으로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아주 기발한 착상 :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외교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던 것

⑵ 서적 간행

 ①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

 ② 국조보감 다시 편찬 : 정사 운영의 방향을 확립

 ③ 실록 보관을 위해 적상산성에 사고 설치


6. 인조반정(仁祖反正)

 ⑴ 집권한 대북파 :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 제거

 ⑵ 희생된 사람과 서인 :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봄

 ⑶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 사대주의자와 능양군(능창군 형)의 반정

  ① 대북파 제거

  ② 광해군 폐위

 ⑷ 광해군 : 강화도 → 제주도

 ⑸ 반정 명분의 문제점

  ① 반정 명분

   ⓐ 명에 사대 거부

   ⓑ 영창대군과 능창군 살해, 인목대비 유폐 : ‘폭정’(暴政)이라고 규정

  ②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했다.

   ⓐ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이고 후금(청)은 일어서는 나라

   ⓑ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이후 계속된 중국과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 반정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 무너지고 다시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치욕을 겪음(삼전도(三田渡) 굴욕)

  ③ 폭정

   ⓐ 폭정 :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

   ⓑ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한 것으로 모든 왕이 정적 제거에는 틈을 보이지 않았다 : 민생 구제와 안정에 주력한 왕

 ∴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

  ①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가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② 인조반정은 반란에 불과한 사건 : 주도 인물은 사대주의자 지배층으로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


7. 광해군 가족의 비참한 말로와 광해군의 유배 생활

 ⑴ 광해군,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 강화도에 위리안치

  ① 감시하기 쉬운 곳

  ② 광해군, 폐비 유씨 : 강화부 동문쪽

  ③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 강화부 서문쪽

 ⑵ 위리안치된 두달쯤 후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자살

  ①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시도한 듯

  ② 폐세자 질 : 담 밑에 구멍을 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생포

   ⓐ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 쌀밥,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 은덩어리 :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으로 추측

   ⓒ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 :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을 옹호하던 그와 함께 반정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추측

   ⓓ 인목대비, 반정 세력 : 폐세자 질을 죽이기로 결정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자살

  ③ 폐세자빈 박씨

   ⓐ 폐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위에 있었다 : 망을 본 듯

   ⓑ 폐세자가 탈출에 실패, 다시 안으로 붙들려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 이후 자살

 ⑶ 폐비 윤씨 :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성

  ① 한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책을 주청

  ② 광해군이 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

  ③ 화병으로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만에 사망

 ⑷ 광해군

  ① 인목대비, 인조 세력 : 죽이려고 몇 번 시도하나 영의정 이원익(남인)과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 때문에 살해 기도 실패

  ② 1624년, 이괄의 난때 인조 : 광해군의 재등극이 걱정되어 그를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강화도에 데려옴

  ③ 1636년, 청이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

   ⓐ 조정 : 광해군을 교동에 안치

   ⓑ 신경진(서인) 등이 경기수사에게 광해군을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

ⓒ 1637년,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 : 광해군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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