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 ~ 7월 27일(음력 6월 29일)
[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4일 기록 내용]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때 싸우다가 죽은 문무(文武) 제장(諸將)들에게 서둘러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온 성이 다 도륙되어 한 사람도 살아난 자가 없고 우리나라의 제군(諸軍)도 감히 가까이 간 자가 없어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서 말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진실된 보고를 기다리고자 하여 감히 계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근자에 전후의 장계를 상고하고 계문을 참고해 보건대,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은 몸소 성을 순행하면서 눈물로 사졸들을 위무하였고 성이 함락될 때 좌우가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채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너희들이나 피하라.’ 하고서 최영회(崔永會)와 더불어 촉석루(矗石樓) 위에서 통곡을 하고는 이내 스스로 벼랑 밑으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은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죽기로 역전(力戰)하였습니다. 서쪽성이 저절로 무너지자 황진은 옷과 전립(戰笠)을 벗어버리고서 사졸에 앞장서 직접 돌을 져나르며 불을 밝혀 놓고 밤새워 일을 하는 한편, 지성으로 백성들을 개유(開諭)하니 성중의 남녀들도 이에 감격하여 힘을 다해 도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성의 보수를 끝냈습니다. 이튿날 적이 물러가자 황진이 성 밑에 쌓인 시체를 굽어보며 ‘어젯밤의 싸움에서 죽은 적이 거의 천여명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그때 성 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쏜 탄환이 이마에 명중되어 죽었습니다.
이종인(李宗仁)은 적 일곱을 사살하고 일어나서 보다가 이마에 철환(鐵丸)을 맞고서 죽었으며, 경상 병사(慶尙兵使) 최경회(崔慶會),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도 성이 함락되던 날에 철환을 맞고서 죽었습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은 성이 함락되어 군사가 흩어지자 연달아 대전(大箭)을 발사하여 적 일곱을 죽이니 적이 약간 주춤하였는데, 잠시 뒤에 철환을 맞고 죽었습니다.
당인(唐人)의 품첩(稟帖)에는 ‘종인의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진주 사람이 전투를 도와줄 것을 청하자 종인이 연거푸 적 다섯을 쏘아 죽이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적이 또 큰 궤(櫃)를 만들어 곡성(曲城)367) 으로 밀고 들어오자 종인이 화살 수십여 대를 쏘아 모두 궤에 맞히고 계속하여 유신(油薪)368) 을 밑으로 던지자 그 섶이 모두 그 박힌 화살에 걸리어 궤에 불이 붙으니 적은 불을 끄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종인은 이때 8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날밤 초경(初更)에 북문(北門)쪽이 위급하여 다시 종인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종인은 그 수하(手下)와 더불어 적을 쏘아 물리쳤다. 그날 밤에 적은 성의 돌을 뽑아내고서 새벽에 돌을 뽑아낸 구멍으로 쳐들어오니, 종인은 궁전(弓箭)을 버리고서 다만 창도(槍刀)를 가지고 적을 쳐죽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적이 약간 물러갔을 때 신북문(新北門)의 창의군(倡義軍)이 형세가 다급함을 보고서 신북문을 버리고 촉석루로 달아나자 적이 드디어 성을 넘어 들어왔는데 종인도 철환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은 몸에 철환을 맞고도 동요하지 않고서 상처를 싸매고 역전(力戰)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몇 사람들은 평소의 역전한 공만으로도 이미 높여 줄 만한데, 함께 한 성에 있으면서 죽음으로 지켜 떠나지 않았고 성이 함락되던 날 의열(義烈)이 이와 같았으니 아울러 특별히 포상하여 충혼(忠魂)을 위로하소서.”하니, 답하기를,“포상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선전관(宣傳官)을 보냈으니 우선 선전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하였다.
1. 진주성 상황
⑴ 진주성 고립
① 유정 : 대구에서 합천으로 진군
② 오유충 : 서산에서 초계로 진군
③ 조승훈과 이령 : 거창에서 함양으로 전진
④ 순변사 이빈, 의병장 곽재우, 좌의병장 임계영 : 각각 단성현을 거쳐 서쪽 소음으로 또는 사천현에서 호남으로
⑤ 김천일(도절제, 2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 : 호남으로의 지리적 요충지란 점 강조 – 소용없었음
⑥ 도원수인 권율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군사작전권이 모두 명군에게 넘어간 상태
a. 명군과 조선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집결상황을 알고 있었다.
b. 명군
- 왜군을 한양에서 무사히 철수하도록 방조한 뒤 강화회담을 시도
- 왜군에게 사신을 보내 ‘진주성 공격을 그만둬라’고 통보하는 정도
⑵ 왜군 10만
① 함안·반성·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을 위해 집결
② 이유
a.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에서 패전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은 ‘진주성의 모든 사람을 몰살시켜라’
b. 호남으로 통하는 활로를 트기 위함도 포함
⑶ 성을 비우자는 ‘공성론’도 나왔지만 결사항쟁 결의
① 류성룡 『징비록』(懲毖錄)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서울 시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며 천일 또한 병법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 고집이 너무 지나쳤다. 게다가 평소부터 서예원을 미워하여 主와 客이 시기했으므로 호령이 어긋나고 틀려서 이 때문에 크게 패한 것이다.”
② 의병장 안방준의 반론 “이 전투가 있었기에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2. 전개과정
⑴ 6월 22일 : 오전 10시경부터 왜군의 침략이 있었고 주간 3전3퇴 야간 4전4퇴의 격전
⑵ 6월 24일
① 왜군은 병력 5~6천명을 추가, 마현에 진 구축 - 전투
② 5~6백명을 추가, 동변에 진 구축 - 전투
③ 왜군은 ‘귀갑차’ 만들기 시작
a. 궤짝 정상부가 귀갑같이 구부러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
b. 나무궤를 사륜차위에 올려놓고 군사 몇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서 손으로 사륜차를 앞으로 추진시키고 강색을 뒤에서 당겨 후퇴시키는 장치
⑶ 6월25일 : 전투양상은 『선조실록』에 잘 나타남
① 왜군 : 동문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서 성을 내려다 보면서 조총 발사
② 충청병사 황진 : 성안에 토성을 만들어 현자포로 응전, 격파
③ 주간에 3전3퇴, 야간에 4전4퇴
④ 김천일 : 명군과 관군측에 구원특사를 보냈으나 원군은 오지 않음
⑷ 6월 26일 : 왜군이 화전을 쏘아서 방화하자 성내의 초옥 들이 일시에 다 타버림
① 진주목사 서예원 : 겁에 질려서 아무런 방도 세우지 못함
② 김천일 : 서예원 대신 사천현감 장윤을 가목사로 삼아 사태를 진정
③ 김준일 :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왜군이 이 틈을 타서 올라왔는데 막으려다 전사
⑸ 6월 27일
① 전투 중 왜군은 철추로 성벽이 돌입할 구멍을 만듬 – 성벽 붕괴의 한 원인
② 김해부사 이종인 : 성에 침입한 왜군 모두 섬멸
③ 귀갑차를 모두 불태움.
④ 표의병부장 강희보 : 전사
⑹ 6월 28일
① 진주목사 서예원의 실수로 그의 담당지역이 야간을 틈타서 왜군에 의해 거의 뚫린 상태
② 여명에 그 곳을 통해 왜군이 집중공격
a. 황진, 이종인을 선두로 하여 격퇴
b. 황진 : 전사
⑺ 6월29일
① 사천현감 장윤 : 전사
② 계속된 장수의 전사로 지휘체제 붕괴
③ 이종인, 이잠, 강희진, 오유 등 : 전사
④ 진주성 함락
⑤ 김천일, 고종후, 양산수 등 : 남강에 투신자결
3. 결과
⑴ 왜군은 본성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듬
⑵ 사망자 : 6∼7만으로 추정
① 대부분이 비전투원
② 왜 : 코무덤, 귀무덤 만들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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