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1. 출생과 가족관계

 ⑴ 아버지는 정(貞),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

 ⑵ 1545년 3월 8일(음력), 출생 :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

 ⑶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 나중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오름)와의 사이에 회(薈), 열( ), 면(葂) 등 3형제와 딸을 둠

 ⑷ 서자 : 훈(薰), 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둠

 ⑸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

 ⑹ 면은 전란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

 ⑺ 훈과 신 : 무과에 오름

 ⑻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조카를 친자식과 같이 대했다고 함


2.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⑴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

  ① 22세, 무예를 배우기 시작

  ② 1572년(28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 :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

  ③ 1576년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④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됨

  ⑤ 1579년 10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

  ⑥ 1580년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됨

  ⑦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

 ⑵ 1590년,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 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 : 모두 대간의 반대로 취소

  ①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② 1583년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움

  ③ 1583년 11월,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

  ④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

  ⑤ 북방 오랑캐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

  ⑥ 1587년 8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 : 병사 이일(李鎰)의 요구 묵살, 오랑캐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

  ⑦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됨 :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이 됨

  ⑧ 1589년 11월, 선전관 겸직

  ⑨ 1589년 12월, 정읍현감에 부임

 ⑶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

  ① 유성룡(柳成龍) :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

  ② 이순신 :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

  ③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


2. 임진왜란 때의 행적

 ⑴ 1592년 3, 4월경,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

 ⑵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①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 병사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게 공문을 보냄

  ② 경상좌우도 수군

   ⓐ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

 ⑶ 원균 :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 요청

  ① 이순신 :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

  ②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장령들의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 : 출전 결단

  ③ 1592년 4월 27일,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

   ⓐ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 출동을 감행

   ⓑ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승리

 ⑷ 1차 출전

  ① 5월 4일, 전선(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② 5월 7일 옥포해전(玉浦海戰), 왜선 40여척 섬멸 :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陞敍)

 ⑸ 2차 출전

  ①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으나 독전(督戰)

  ② 6월 5일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 율포해전(栗浦海戰) 등 :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

 ⑹ 3차 출전

  ① 7월 8일 한산해전(閑山海戰)

   ⓐ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움 :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

  ② 7월 10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 적선 42척 분파

   ⓑ 왜 수군은 전의 상실 :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⑺ 4차 출전

  ① 1592년 9월 1일 부산포(釜山浦) 습격 : 적선 100여 척을 격파

  ②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③ 1593년 8월 15일,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 해결

   ⓑ 장기전을 대비해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

 ⑻ 1594년

  ①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 적선 8척을 분파

  ② 9월 29일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 적선 2척을 격파

  ③ 10월 1일 영등포해전 :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

 ⑼ 1595년 2월 27일,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

 ⑽ 1596년, 원균의 중상과 모함 : 분당적(分黨的) 시론이 심상치 않게 파급

  ①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 간첩 요시라(要時羅) :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 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하며 간곡히 권유

  ②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 :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령

   ⓐ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 : 직접 한산도에 출동 대기하라고 명령

   ⓑ 이순신 : 왜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 우리 기록 :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

   ⓓ 일본 기록 : ‘정월 14일에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했다’

  →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

  ③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모함으로 이순신 파직 : 신임 통제사 원균

  ④ 2월 26일 서울로 압송, 3월 4일 투옥

  ⑤ 4월 1일,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수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特赦)

 ⑿ 원균

  ① 7월 16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왜 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

  ②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 :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

  ③ 이순신 :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⒀ 9월 16일, 13척으로 명량해전(鳴梁海戰) : 명량, 속칭 울돌목

  ① 9월 15일,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嚴達)

  ② 9월 16일, 적선 200여 척과 싸워 해협 통과를 저지 : 왜군은 웅천으로 철수

  ③ 조선수군이 왜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임진왜란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1592년의 ‘한산도해전’과 1597년의 '명량해전'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④ 선조 :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敍勳)하려 했으나 중신의 반대로 중지

 ⒁ 1598년

  ①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

   ⓐ 진영 건설

   ⓑ 피난민의 생업을 진작

  ② 7월 16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데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

  ③ 8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망 : 왜군은 철군 시작

  ④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 보장을 요구

   ⓑ 이순신 :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

 ⒂ 11월 19일, 노량해전(露梁海戰)

  ① 11월 18일 밤 10시쯤, 조명연합함대 : 노량으로 진격

  ② 11월 19일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접전

  ③ 이순신 :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 그의 사후(死後)

 ⑴ 이순신의 묘

  ① 이순신의 상여 : 12월 11일경, 아산 도착

  ② 1599년 2월 11일,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

  ③ 1614년,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

 ⑵ 벼슬 및 기타

  ① 전사후 우의정이 증직

  ② 1604년 10월

   ⓐ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錄勳)

   ⓑ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推捧)

   ⓒ 좌의정에 추증(追贈)

  ③ 1643년,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

  ④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 아산에 현충사(顯忠祠) 설립

  ⑤ 1793년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⑥ 1795년,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


※ 1차 출전

 1.옥포해전, 2.합포해전, 3.적진포해전


※ 2차 출전

 4.사천해전(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5.당포해전 6.1차 당항포해전, 7.율포해전


※ 3차 출전

 8.한산도해전, 9.안골포해전, 10.장림포해전, 11.화준구미해전, 12.다대포해전

 13.서평포해전, 14.절영도해전, 15.초량목해전, 16.부산포해전

 17.웅포해전(2차웅포해전도 있음), 18.2차 당항포해전 19.장문포해전(영등포해전 포함)


※ 4차 출전

 20.명량해전, 21.절이도해전, 22.예교해전(장도해전), 23.노량진해전


4. 인품과 문학

 ⑴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 없다.

  ① 유성룡의 징비록』(징비록(懲毖錄) :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② 고상안(高尙顔, 당시 삼가현감)

   ⓐ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

   ⓑ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 : 태촌선생문집(泰村先生文集) 권3

  ③ 진린

   ⓐ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라고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 공적을 자세히 보고

   ⓑ 명 :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⑵ 난중일기(亂中日記)

  ① 7년 전란의 진중 일기

  ② 기록 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

  ③『임진장초』(壬辰狀草)[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

 ⑶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권1

  ①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는 시」

  ② 「무제육운」(無題六韻)

  ③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④ 「한산도가」(閑山島歌)

 ⑷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 한산도의 작품이 20수 수록

 ⑸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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