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산군 폐위, 진성대군 등극(중종 반정)
⑴ 성희안
① 거사(擧事)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한 사람
②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
③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
④ 이조참판시절 망원정에서 연산군이 연회를 즐길고 있을때 그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올렸다가 종9품 ‘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
⑤ 박원종에게 가장 먼저 접근
⑵ 박원종
① 연산군의 신임으로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 재정을 맡았던 인물
② 누이 박씨부인 사건
ⓐ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의 후실 : 인물이 절색
ⓑ 연산군이 겁간 : 박씨부인 자결
ⓒ 연산군에 대한 감정 극도로 악화 : 1506년, 삭직(削職)
③ 거사 직전에 신수근과 접촉
ⓐ 연산군의 처남, 진성대군의 장인
ⓑ 접촉 목적 : 그를 끌어들일 의향보다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
ⓒ 박원종 :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냐” - 신수근은 이 질문 의도를 모름
ⓓ 신수근 : 거사 계획을 듣고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된다”
⑶ 1506년 9월 거사
①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가 취소되어 일시 유보하려고 함
②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정일에 거사 결정
③ 반정 성공
ⓐ 훈구 세력 : 정치 주도권 장악
ⓑ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
2. 중종의 정책
⑴ 연산군 폐정(廢政)으로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 잡고 정치 수준을 올리는 데 역점
⑵ 홍문관 기능 강화 : 왕의 자문 담당
⑶ 경연 중시 : 정책 논쟁 강도 높임
⑷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 : 문벌 세가 견제
⑸ 왕도 정치를 앞세워 훈신과 척신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
① 초기에는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②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해 왕의 입지가 미약한데서 비롯된 것
③ 공신 대부분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사림 성향의 왕도정치 추구는 그들의 저지와 도전에 직면
⑹ 박원종이 죽은 후 개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 비등
⑺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 위주로 형성
3.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⑴ 1519년 11월,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재상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
⑵ 조광조(趙光祖) : 사림의 대표 인물
①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 추진
② 경연을 강화 :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중종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고 노력
③ 낭관(郎官)에게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 부여 : 실무 결정과 집행과정에서 재상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 형성
④ 천거제 실시 : 지방의 사류와 성균관의 학생을 정치에 참여
⑤ 공론정치 강화 :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의견도 정치에 수렴하려고 노력
⑥ 향촌의 운영에도 관심, 향약(鄕約) 실시 : 언해여씨향약
⑦ 반정공신 :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기득권이 위협당하자 사림과 대립하기 시작
⑶ 1519년,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
①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
②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
③ 76명(공신의 3/4)의 공신호 삭탈 : 나누어 주었던 토지와 노비 몰수
⑷ 중종
①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림 지원
② 사림 독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③ 대규모 공신 삭제 같이 사림 독주를 허용하는 조처 반대 : 주장에 밀려 삭제 인정
④ 위기감을 느끼고 사림을 견제할 방법 모색
⑸ 피해를 입은 공신 역시 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
① 사림의 탄핵으로 상당수 중앙정치에서 탈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권력이 위축
② 대규모 공신 삭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심한 위기의식을 가짐
③ 김전(金銓), 남곤,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반격
⑹ 희빈홍씨의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字)
①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
② 왕에게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보여주어 위기의식을 갖게 함
⑺ 1519년 11월, 홍경주 등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 :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① 조광조 : 능주(綾州)로 귀양, 사사(賜死)
②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 등 : 귀양, 사형당하거나 자결
③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유인숙(柳仁淑), 이자 등 : 유배, 파직
④ 사림이 언관과 낭관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언관과 낭관의 핵심 인물
⑻ 결과
① 공신세력이 요직에 임명, 주도권 장악
② 사직된 공신에게 공신호 반환
③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
④ 사림의 권력기반이었던 낭관권(郎官權) 혁파에 노력
ⓐ 낭관권 : 낭관 품계를 가진 5품 이하의 관원으로 재상권으로 대변되는 의정부와 육조장관의 그것과 대응되는 것
ⓑ 낭관권의 핵심요소인 자천제(自薦制)나 낭관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삼으면서 사림이 강화될 수 있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
⑤ 일시적인 효과
ⓐ 공신의 정치 비리를 공격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당시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언권과 낭관권이 서 있었으므로 근본적인 불식이 어려웠기 때문
ⓑ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4. 그 외 정치적 혼란
⑴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辛巳誣獄) : 안처겸(安處謙) 등이 무리를 모아 변란을 일으키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일어난 옥사
⑵ 김안로(중종과 사돈) 파직
⑶ 1527년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
① 김희(효혜공주의 남편, 김안로의 아들) : 심정 등을 제거하고자 일으킴
② 아무 관련없는 경빈 박씨, 복성군이 쫓겨난 뒤 죽음 : 나중에 복권됨
⑷ 김안로와 외척 윤원로, 윤원형 형제 대립 : 훈신과 척신의 정권 쟁탈전
5. 불안한 국방
⑴ 삼포왜란 : 부산포(지금의 동래), 내이포(지금의 태천), 염포(지금의 울산)에서 폭동
① 왜와 통상 중단
② 왜의 요청으로 1512년 임신조약 체결
⑵ 1522년, 추자도 왜변, 동래 염장 왜변
⑶ 1529년, 전라도 왜변
⑷ 1544년, 사량진 왜변 : 왜인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
⑸ 야인의 내침 : 4군 6진 지역에 대한 계속된 노략질
⑹ 정로위 설치 : 야인이 극성을 떨자 왕권 호위 강화를 위해
⑺ 비변사 설치 :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임시 합좌회의 기관 → 영구적인 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정치 기관 성격도 가짐
6. 사회
⑴ 조광조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
⑵ 미신 타파 :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 폐지
⑶ 불교의 도승제도 철폐
⑷ 도성 안의 무당 단속
⑸ 절 신축 금지
⑹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 조성
7. 경제
⑴ 저화(楮貨), 동전 사용 적극 권장
⑵ 도량형 통일 시도
⑶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된 사치 금지
⑷ 민생 안정에 노력
8. 문화
⑴ 1516년, 주자도감 설치 : 많은 동활자 주조
⑵ 많은 책 편찬 간행 :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
∴ 정치 혼란으로 각 방면의 진흥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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