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폐비 윤씨

 ⑴ 성종

  ①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

   ⓐ 성종의 정치력에 힙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

   ⓑ 이면에 숨어 있는 퇴폐 풍조

 ⑵ 숙의에서 중전 자리에까지 오름

 ⑶ 성종이 후궁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후궁 독살 계획을 수립, 발각

 ⑷ 빈으로 강등될 위기 :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지 않음

 ⑸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냄

 ⑹ 폐비론(廢妃論) 대두

  ① 대부분의 신하 : 다음 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인 까닭에 폐할 엄두를 못냄

  ② 성종 : 부부의 정 때문에 폐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가능

  ③ 인수대비(윤씨 시어머니) : 강력한 폐비론

  ④ 한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의 사림 세력이 폐비론에 가세

  ⑤ 성종 : 일부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

 ⑺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

  ① 폐비 윤씨 동정론 대두 : 윤씨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

  ②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와 일부 후궁 :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으로 고해바침

  ③ 성종 : 사약 내림

 ⑻ 세자 융(윤씨가 폐비될 당시 4살)

  ①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 자라나 잘 따르지 않았고 윤씨 역시 사랑을 쏟지 않음

  ② 할머니 인수대비 : 융에게는 가혹하게 대했고 정현왕후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임


2. 연산군의 폭정(暴政)

 ⑴ 1494~1498(무오사화)이전

  ① 폭군(暴君)의 모습이 아니었다.

  ②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에 민간은 질서를 유지

  ③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

  ④ 여러 차례 사림파 관료와 신경전 : 간언 및 연산군에게 학문 강요

  ⑤ 연산군 : 학문에 뜻이 없었고 학자와 문인을 경원(敬遠)시

 ⑵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①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난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일손, 권오복, 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② 사림파 :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 이극돈, 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

   ⓐ 김종직 :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

   ⓑ 김일손 :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질책

   ⓒ 이목 :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

  ③ 훈구파 : 연산군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

  ④ 직접적인 도화선 :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

  ⑤ 이극돈 : 「조의제문」은 세조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유자광에게 보고

  ⑥ 유자광, 외척 :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

  ⑦ 연산군 : 김종직과 그의 문인을 대역죄인으로 규정

   ⓐ 김종직 : 부관참시(剖棺斬屍)

   ⓑ 김일손 등 : 능지처참(陵遲處斬)

  ⑧ 영향

   ⓐ 신진사림파 : 큰 타격을 입고 중앙정계에서 후퇴

   ⓑ 연산군의 전횡

   ⓒ 훈구파 득세

   ⓓ 정국 경색

 ⑶ 연산군의 패륜 행위와 사치

  ① 여염집 아낙 겁탈

  ② 사냥에 방해된다고 민가 철거

  ③ 친족과 상간(相姦)

  ④ 매일같이 향연

  ⑤ 기생을 궁으로 : 이 기생을 ‘흥청’이라 했는데 여기서 ‘흥청거리다’라는 말 유래

 ⑷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①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야기되어 훈구와 사림이 피해를 입은 사건

  ② 국가재정이 궁핍해지자 재정 부담을 백성과 훈구 재상에게 지우자 재상과 연산군의 관계가 악화

  ③ 외척 신수근(愼守勤, 연산군의 비인 신씨 오빠)을 중심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이 연산군을 지원

  ④ 구체적인 계기 : 연산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

  ⑤ 임사홍의 폐비 윤씨 사건 밀고 : 어머니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⑥ 성종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 살해

  ⑦ 그녀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보내어 사사(賜死)

  ⑧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함

  ⑨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존(追尊)하고 성종 묘에 배사(拜謝) : 반대한 언관 권달수(權達手)는 죽이고 이행(李荇)은 유배

  ⑩ 연산군 :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와 사림을 제거하려고 시도

  ⑪ 윤씨의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사형

  ⑫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

  ⑬ 많은 사림 세력 제거 : 홍귀달(洪貴達), 심원(沈源), 이유녕(李幼寧) 등

  ⑭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緣坐)

 ⑸ 그 외

  ① 경연, 사간원, 홍문관 등 폐지

  ②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

  ③ 모든 상소와 격고(擊鼓)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를 철폐

  ④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⑤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⑥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 발생 : 훈민정음 사용 금지


3. 1506년, 박원종이 중심이 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 1506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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