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택 후궁에서 중전으로
⑴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
①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
②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 :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
2. 폐비 윤씨
⑴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
⑵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
⑶ 아버지 윤기견
①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음
②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③ 일찍 죽음
⑷ 윤씨 어머니 신씨
① 윤기견의 둘째 부인
②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
⑸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의 첩지를 받은 것 :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
3. 정현왕후 윤씨
⑴ 파평 윤씨 명문가 출신
⑵ 같은 해 6월에 입궐 :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 후궁의 나이에도 못미침
⑶ 아버지 윤호 : 당시 권력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의 조카뻘
4. 승은(承恩) 후궁 : 엄귀인, 정소용
⑴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기전 승은 후궁
⑵ 드라마 ‘왕과나’에선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
5. 중전 간택
⑴ 공혜왕후가 승하(昇遐) :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⑵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기준 : 세종조 관례
① 자식 유무
② 나이
⑶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
①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
②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보임
6.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⑴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 출산
⑵ 권력이동의 축 :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세력이 약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⑶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①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 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
②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 기록 : 많이 부족
③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 두 후궁을 적극 옹호
ⓑ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④ 성종의 교지
ⓐ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
ⓑ 대신 :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
ⓒ 철회
⑤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 :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
⑷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① 성종 10년 6월, 윤씨 :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남
②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 :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궁으로 불러들임
③ 아직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 : 5일 뒤 사망
④ 성종 : 그로부터 석달 뒤 새로운 간택후궁인 권씨를 숙의로 책봉해 입궁시킴
⑸ 폐비 윤씨 축출과정에서 인수대비 역할
①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다
②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③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
④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간 싸움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
⑹ 귀인 엄씨, 귀인 정씨
①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贖良, 조선시대 노비에게 대가를 받고 그들의 신분을 풀어주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던 제도)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
②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수빈 한씨(인수대비), 안순왕후(왕대비), 정희왕후(대왕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
7.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⑴ 성종
①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
②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
③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
④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
⑤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
⑥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
ⓐ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의 의견 묵살
ⓑ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 :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
⑦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
⑧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임
⑨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賜死)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
⑵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①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 :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 없던 내용
② 투기를 심했다 :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③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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