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란사
⑴ 명칭 : 뒷절벽에 붙어 자생하는 고란초에서 연유
⑵ 고란초는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나 몇뿌리만 겨우 찾을 수 있을 뿐이고, 고란초가 자생하는 바위 아래에 있는 고란(약)수<백제왕(특히, 의자왕)은 이 물만 마셨다는데 이 물 한 모금이면 3년씩 젊어진다고 한다>가 유일
2. 백마강
⑴ ‘금강’의 별칭
⑵ “백제를 치기 위해 사비성(현 부여)에 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강을 지키는 용을 낚기 위해 부소산 아래 조룡대에서 백마를 미끼로 한 낚시로 그 용을 낚아 부여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온 듯
3. 낙화암
⑴ 『삼국유사』<백제고기> : ‘타사암’(墮死岩)
⑵ 660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 궁녀 3000명이 굴욕을 피하려고 이곳에 와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곳
⑶ 뒷날 궁녀를 꽃에 비유하여 미화한 이름 : 고려 시대에 이미 낙화암으로
① 고려 시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 1298∼1351)의 시 :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 니 천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
②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 1341∼1371)의 시 :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
⑷ 백화정(百花亭) :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건립
⑸ 『삼국유사』권1 태종 춘추공 조 :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⑹ 궁녀가 아니고 대부분 쫓기던 민초와 병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⑺ 의자왕(義慈王, 무왕 아들)의 정치 실패를 확대, 과장시킨 것
① 3000명이 줄을 지어 통곡하고 뛰어 내릴 공간이 없다
② 낙화암의 높이는 약 10m
③ 백제가 멸망할 당시 총 가구 수는 약 76만 호, 인구는 약 620만 명 정도
④ 『동국여지승람』권18 충청도 부여 편
ⓐ ‘낙화암’으로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투신 자살했던 궁녀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 백제가 멸망할 때 사비성(현 부여)의 가구 수는 약 10000가구, 인구는 약 45000명, 병사 수는 약 2500명
⑤ 위와 같은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과연 가능했을까? 약 300명정도 궁녀가 가능한 숫자
⑥ 집권 초기
ⓐ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
ⓑ 성충, 흥수, 계백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을 베풀었다
⑦ 김춘추(무열왕), 김유신의 정복 전쟁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책임은 있다
3. ‘삼천궁녀’라는 말은 어디서 누가?
⑴ 어떠한 1차 사료도 궁녀가 3000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
⑵ 『동사강목』권2 경신년 가을 7월조, 안정복의 기록 : “여러 비빈(妃嬪)이 자살하였다”
⑶ 이홍직 『국사대사전』(1962)
①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
②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③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적어 놓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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