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국(震國)과 발해(渤海)
⑴ 대중상과 대조영 부자는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백두산 주변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정치 세력을 묶어 ‘진국’을 세워 활동
⑵ 698년경, 영주로 옮겨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
⑶ 발해 건국에 영주의 정치 군사 세력과 함께 백두산 주변에서 활동한 진국 등 정치 세력이 참가한 사실이 동시에 취급되어야 한다
① 진국 세력을 외면하고 영주(榮州, 현 朝陽) 세력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워서는 안된다
② 발해 건국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진국 건국과 발전 과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⑷ 발해(698년)전까지의 최고 통치자는 대조영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대중상 : 진국
⑸ 진국 → 발해 :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
∴ 고구려 유민은 왕조 멸망 직후부터 줄기차게 국권 회복 운동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진국을 세우고 이를 더욱 확대해 발해를 건국
2. 대중상(대조영(발해 건국자) 아버지)
⑴ 고구려때 활동상
① 정예로운 부하 장병을 많이 거느리고 군사 활동에 적극적
② 631년부터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 공사에 참가 : 16년만에 완공
③ 속말말갈의 장수로서 군사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고구려 발전에 이바지
⑵ 보장왕
① ‘조선 군왕’으로 임명되어 요동 지방에 파견 : 고구려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고구려 유민 세력을 와해시키려는 목적
② 『발해국왕세략사』677년조 : “장이 요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며 중상과 서로 통했다”
③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
⑶ 677년경 대중상의 정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컸다
① 고구려 멸망전에 그의 아래에 수많은 군사들이 집결
② 677년경, 더 큰 규모로 확장 : 백산(백두산 주변)과 속말수 유역을 영향하에 두었다
③ 발해 건국에 선행한 후국 정도의 정치 세력을 형성
3. 진국 건국 연대 : 발해 건립에 이바지한 선행 국가로서 영주 세력과 함께 발해 건립 과정을 추진시킨 정치 세력이었으므로 건국 연대를 밝히는 것은 발해의 건국 과정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⑴ 성력연간설(698년)
① 『구당서』발해 말갈전 : “……성력 연간<698년 1월 ~ 700년 5월>에 스스로 서서 진국왕이 되었다”
② 문제점 : 진국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
ⓐ 진국 : 발해 건국이전에 존재한 후국
ⓑ 발해 건국 연도가 698년
ⓒ 장기간에 걸친 고구려 유민의 국권 회복 운동을 부정, 말살하는 것
③ 진국 건국자가 대조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진국을 부정하는 것
⑵ 696년 설
① <협계태씨 족보> 편찬자에 의해 제기
② 원래 족보에 실린 진국의 건국 연대나 아니라 여러 번 편집하는 과정에 가필(加筆)되어 그대로 고착된 것
⑶ 684년 설
① 이승휴 『제왕운기』발해기 : “고구려 옛 장수 대조영이 주나라 측년 원년 갑신(684년)에 건국해 국호를 발해라 했다”
② 684년에 건국한 진국을 발해로 오인했으므로 발해왕조 존속 기간을 926년까지 242년이라 하였고 그 시조도 대조영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⑷ 678년 설
① 『삼국유사』말갈 발해조에 인용된 『구삼국사』: “의종 3년 고종 무인(678년)에 고려의 남은 자손이 한데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밑에 의거해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
② 진국을 발해라고 한 것은 틀리지만 건국자를 대조영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제왕운기』등의 기록보다 더 믿음성이 있다.
4. 대조영은 발해 건국을 어떻게 추진했는가?
⑴ 698년, 발해 건립
① 진국(발해 전신) 세력 강화
② 영주 지방으로 옮겨가 살던 고구려 유민을 동원, 국권 회복 운동을 추진
③ 말갈족과 연계 강화
⑵ 단군 조선과 고구려 역사 연구
① 목적 : 고구려 유민을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② 『단군봉장기년』(檀君封藏紀年) 집필
⑶ 진국 말에 부하를 여러 지방에 파견해 발해가 건국하면 곧 발해에 병합되도록 사전 준비 사업을 진행
⑷ 통치 초기에 발해의 중앙과 지방 관제, 전시과 제도, 교욕, 문화 등 각 분야 제도가 정연하게 수립된 것을 보면 이미 건국 전에 상당 기간 동안 사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⑸ 말갈족과의 연계를 긴밀히 가지고 그들을 폭넓게 포섭해 발해에 순종하도록 했다
① 발해 건국전 영주 폭동에 참여
② 발해 건국 과정에 걸사비우(말갈 우두머리) 등이 참여
③ 발해 건국후 국가 발전에도 큰 기여
5. 발해 건국이 갖는 의의는?
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성격과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계기
⑵ 한국 역사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을 기본 축으로 발전했다
6. 발해는 고구려 영역을 거의 모두 차지했는가?
⑴ 5경 15부 62주가 있는 발해 본토는 옛 고구려의 영토인가?
① 가탐 <도리기>, 『신당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일부 지역만이 고구려 영토인 것처럼 기록
② 발해 본토는 모두 옛 고구려의 영역
⑵ 발해의 동북부 속령은 옛 고구려 영역을 그대로 넘겨받은 것인가? 발해가 넓은 속령 지역까지 모두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이미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 지역을 속령으로 삼고 통치할 수 있었다.
⑶ 발해는 고구려 영역을 거의 모두 차지했는가? 거의 비슷
① 발해는 고구려 영역을 거의 모두 차지했으나 영역 범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② 발해와 고구려 영역 범위가 일치하는 곳
ⓐ 동쪽 : 동해
ⓑ 서쪽 : 요하 유역
ⓒ 남쪽 : 중부 한국
ⓓ 북쪽 : 흑룡강 하구
③ 발해와 고구려 영역 범위가 다른 곳
ⓐ 동쪽 : 바다(동해)가 있어 일치
ⓑ 서쪽 : 거란이 있어 요서 지방에 진출할 수 없었다
ⓒ 남쪽 : 덕원과 대동강까지 - 고구려는 시기에 따라 다르나 휠씬 남쪽
ⓓ 북쪽 : 거의 일치
7. 발해국에 대한 당나라 통치자들의 적대적인 감정
⑴ 발해 건국 과정에 측천무후가 거란 출신 이해고 장군을 시켜 발해군 추격
① 고구려 유민과 말갈군인을 강력히 진압
②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의 봉작을 주어 꾀이려고 했는가 하면 무력으로 진압, 살해
⑵ 725년, 흑수 말갈과 함께 발해 협공 : 실패
⑶ 처음부터 발해를 인정하지 않고 ‘발해 말갈’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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