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 고타소(古陀炤)가 남긴 한(恨)

 ⑴ 백제 의자왕 : 642년, 대야성(지금의 합천) 공격

  ① 성주 김품석(김춘추 사위) 사망

  ② 고타소 사망 : 머리가 없었다.

 ⑵ 고타소

  ① ‘옛날에 불에 기울고 무너질 뻔한 아이’라는 뜻

  ② 섶 불 위에 얹혀졌던 문희를 구해내어 얻은 딸이었기 때문


2. 진흥왕(540~576 재위)의 한수(漢水, 한강) 경략(經略)

 ⑴ 한수 : 이곳의 차지 여부는 국부(國富)의 향방을 가름하는 것

  ① 중국과 무역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

  ② 한반도의 중심에 있어 종횡을 아우르는 내륙의 교점

  ③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원이자 반도의 상권을 좌우하는 인자

  ④ 고대국가 완성이 가장 먼저였던 백제가 구축한 고대 상업 세력권의 중추 기지가 한수

  ⑤ 고구려 광개토왕(391~412 재위), 장수왕(413~491 재위) : 한수를 차지하면서 동북아 최대 강국으로 군림

 ⑵ 내물왕(356~402 재위)

  ① 고대국가 체제 정비

  ② 김씨 왕위세습의 기반을 다짐

 ⑶ 진흥왕 정책

  ① 내치(內治) 안정을 위해 군주가 주(州) 행정과 군사를 총괄

  ② 화랑도를 통해 인재를 길러 국가 기틀을 갖추었다.

  ③ 국력을 대외 정복에 집중

  ④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행

   ⓐ 점령지의 반란을 막는 정잭

   ⓑ 신라의 인구를 넓히는 정책

  ⑤ 백제 성왕과 밀약

   ⓐ ‘신라가 한수 상류의 10군, 백제는 한수 하류의 6군을 차지하자’

   ⓑ 나제연합군(羅濟聯合軍) 형성, 신라는 한수 하류 차지

  ⑥ 중국과의 교류를 트기 위해서는 한수 하류가 필요

   ⓐ 백제 침공

   ⓑ 황무(黃武)에서 거서(巨黍)에 이르는 벌판 차지

  ⑦ 백제 성왕

   ⓐ 배신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화친을 가장하며 여식을 바침

   ⓑ 1년 후 침공, 관산성 함락

   ⓒ 서라벌 침공, 실패 : 성왕은 목숨을 잃고 진흥왕에게 출가한 백제 공주는 자살 - 이 일은 두고 두고 백제 공격을 받게 되는 원인


3. 김춘추 집안의 내력

 ⑴ 진지왕 (576~579 재위) : 진흥왕 동생 사륜(舍輪:金輪)

  ① 『삼국유사』 : 사량부에 사는 도화녀(桃花女)를 사모하여 죽은 뒤 다시 나타나 사랑을 나누어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② 반정 세력(만호부인(동륜태자비) 중심)에 의해 죽음

 ⑵ 진평왕(579~632 재위)때 ‘비형’

  ① ‘비형’ : 김용춘 (김춘춘 아버지)

  ② 진평왕 둘째 딸 ‘천명’(첩실 소생, 옹주)과 결혼

   ⓐ 옹주 남편이 왕이 될 가능성은 희박

   ⓑ 진평왕 입장에서 최고의 선택


4. 김유신 집안과의 인연

 ⑴ 김서현

  ① 김유신의 아버지

  ②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의 손자

  ③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 : 골품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

 ⑵ 덕만(德曼) → 선덕여왕(632~647 재위)

  ① 진평왕의 큰 딸

  ② 아들이 없는 진평왕은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시도

   ⓐ 귀족 반발이 예상

   ⓑ 당 고조(이연)에게도 도움 요청 - 모란 그림 병풍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내었고 덕만은 벌과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여 귀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③ 진평왕의 비호아래 대리청정 : 조카 김춘추를 신뢰

  ④ 632년, 왕위 계승 : 민생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국적인 불사만 거듭

 ⑶ 문희 (언니는 보희)

  ① 김유신의 둘째 동생

  ② 축국을 하던 중 찢어진 김춘추(이미 결혼한 상태) 옷을 꿰매준 것이 인연이 되어 임신

  ③ 김유신은 명분을 얻기 위해 문희를 불태우는 소동을 일으키나 덕만이 이를 말림


5. 고구려에 가다

 ⑴ 대야성(지금의 합천) 상실

  ① 백제 의자왕 : 642년, 신라 서쪽 40여성 빼앗고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 공격

  ② 대야성(지금의 합천) 상실

   ⓐ 딸 고타소 잃음

   ⓑ 낙동강 곡창지대 상실

   ⓒ 김춘추 집안의 정치 경제적 기반 상실

   ⓓ 사위 김품석의 떳떳하지 못한 죽음으로 인한 신랄한 비판

 ⑵ 고구려 연개소문

  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

  ② 왕의 아우 대양(大陽)의 아들인 장(藏)을 보장왕(寶藏王, 642~668 재위)으로 옹립

  ③ 막리지(莫離支)에 취임

 ⑶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연합을 도모

  ① 당 : 삼국과 근거리 외교 고수

  ② 고구려 방문

   ⓐ 신라가 당과 고구려를 취사선택할 수 있음을 내외에 천명해 당을 압박

   ⓑ 당과의 협상을 위해서도 좋은 기회

   ⓒ 고구려 내정까지 분석

 ⑷ 선덕여왕에게 자신의 수행을 김유신이 맡도록 해줄 것을 요청

  ① 김유신이 군권(軍權)을 갖도록 하기 위한 계책

  ② 품석의 실행(失行)으로 인한 파문을 잠재우고 집안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는 집안 내에 무력을 가진 자가 있어야 했다.

  ③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 근처까지 김춘추를 수행함으로써 별동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⑸ 보장왕에게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

  ① 보장왕 : “죽령이 본디 고구려 땅이니 이를 돌려주면 군사를 보내주겠다”

  ② 김춘추 : 거절, 객관에 구금

  ③ 연개소문 : 고구려 남쪽 경계를 정탐한 김춘추를 살려둘 수는 없었으나 보장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온 김춘추였기에 그를 죽이는 것은 자신의 입지나 고구려의 외교에 실(失)이 많을 것이라 판단

  ④ 선도해 : 김춘추도 알고 있는 불경 속 이야기 즉, ‘토끼의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⑤ 김춘추

   ⓐ 선도해가 들려준 우화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 ‘죽령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니 신이 신라로 돌아가면 왕께 청하여 필히 죽령을 돌려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장왕에게 올림

  ⓒ 반대도 있었으나 김유신의 북진도 있어서 구금에서 풀려 남

  ⓓ 고구려 군사에게 “국가의 강토는 사신이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 작은 신의는 때때로 묻히는 것이다”


6. 안의 건탑(建塔), 밖의 출병(出兵)

 ⑴ 황룡사 9층 목탑

  ① 김용춘이 감군(監君)이 되어 탑을 세우고 있었다.

  ② 자장이 황룡사에 탑을 세우면 태평이 성사되리라 하여 시작된 일

  ⓐ 탑을 9층으로 쌓자고 제안

   ⓑ ‘9’ : 많다, 찾다(究), 궁극(極)이란 뜻을 가졌으며 천하태평을 의미

   ⓒ 병약한 선덕이 생각하기에 9층탑은 심신의 안녕을 빌기에 그만일 것 같았다.

  ③ 목탑 건축은 전역과 기근에 찌든 민초의 고혈을 빼는 대공사

  ④ 자장 : 탑 안에 들어갈 사리 보관을 통해 불교계를 통솔

  ⑤ 김용춘 : 왕의 환심을 사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해 춘추의 계위를 이루려 했다.

 ⑵ 김유신의 백제 공격

  ① 김용춘이 선덕여왕을 설득해 이루어진 것

  ② 백제의 7성을 함락 : 백제의 반격

  ③ 선덕여왕 :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달렸다”며 김유신에게 의지

 ⑶ 고구려 출병을 요구하는 당 태종의 친서가 서라벌에 도착

  ① 귀족 :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다면 김유신이 남은 군권마저 장악하게 될 일

  ② 김춘추 부자 : 당 태종의 고구려 친정에 도움을 준다면 장차 당 태종에게 정치적 지지를 얻게 될 것

   ∴ 가문의 영화를 일으키는 첩경이 안으로는 건탑, 밖으로는 출병


7. 왜로 가다

 ⑴ 당나라와 전략 교류(김유신의 요하 출병) 실패, 백제의 신라 7성 함락

  ① 선덕여왕의 자책

  ② 고구려 보복이 우려되는 상태 : 김춘추 일가는 다시 정치적으로 수세

 ⑵ 왜

  ① 120년동안 권력을 잡았던 소아가(蘇我家) : 황극 천황의 장자인 중대형에 의해 타도

                                   ↘ 오랫동안 백제와의 선린을 구축해온 세력

  ② 경황자(중대형의 삼촌) 효덕천황으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중대형이 장악

 ⑶ 『일본서기』

  ① 능숙한 왜어로 신라와의 결속을 제안

  ② ‘새 술은 새 항아리에 담아야 하듯 이제 왜도 신라와의 연합을 꾀하는 것이 어떠하냐’

 ⑷ 중대형과 백제 의자왕

  ① 중대형 : 삼국 정세로 볼 때 고구려와 백제, 강한 둘을 버리고 약한 신라를 취한다면 왜의 명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

  ② 의자왕 : 김춘추를 백제 사신에게 죽이라고 전함

  ③ 김춘추가 효덕천황을 만났을 때는 이미 효덕천황과 백제 사신이 대응책을 숙의한 후

   ⓐ 효덕 : 진흥왕이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결렬시키고 장인인 성왕을 죽인 일을 질책

   ⓑ 신라 대통을 이을 가능성이 있는 김춘추를 죽이라는 요청 쇄도

   ⓒ 앞으로 신라와의 관계를 생각, 죽이지 않고 객관에 인질로 : 1년동안 있었다.


8. 승만(勝曼) → 진덕여왕(647~654 재위)

 ⑴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毗曇)의 정변

  ① 비담의 격문 : 황룡사탑을 건립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고구려의 남변 공격으로 보복의 위기를 자초한 선덕의 실정을 거론

  ② 김유신 : 군사 소집, 진압하려 했으나 정변에 대한 민중 호응이 커서 한동안 열세

  ③ 월성에 유성(流星)이 떨어진 것을 두고 비담은 ‘선덕왕이 패망할 징조’

  ④ 김유신 : 목인(木人,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달아 띄웠고 김유신의 사주를 받은 첨성대 관원이 ‘유성이 다시 비성(飛星)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니 이는 길조’

  ⑤ 선덕여왕 승하 : 비담 일파를 참살

 ⑵ 승만 → 진덕여왕

  ① 김유신이 추대

  ② 1년여 동안 왜에 억류되었던 김춘추 : 선덕왕의 부음으로 석방

  ③ 선덕왕의 친불책과 잘못된 정치뒤에는 김춘추 세력 때문이라고 생각

  ④ 진평왕이 신임했던 장군 알천을 상대등으로 내세워 김춘추와 김유신 계열과 대적


9. 김춘추와 당 태종(이세민)

 ⑴ 알천

  ①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

  ② 중도노선을 견지하면서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처신

  ③ 진덕여왕 : 김유신과 김춘추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⑵ 김춘추

  ① 셋째 아들 문왕을 데리고 당으로

  ② 장안의 국학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의 중지를 듣고 당 태종을 배알

  ③ 나당연합(羅唐聯合)을 맺어 고구려를 칠 것을 제안

   ⓐ 당태종 : 요동의 지형적 여건을 들며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표명

   ⓑ 김춘추 : “고구려는 계속 한재가 들어 먹을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일부 군사를 교대로 강역을 소란하게 하면 백성들은 싸움에 시달려 떠날 것이다. 따라서 수년 사이에 천리의 땅이 소연하게 될 것이니 압록수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④ 중국의 관복제를 따를 것을 약속

  ⑤ 아들 문왕의 숙위를 약속


10. 지속적인 친당정책

 ⑴ 김유신

  ① 김춘추 일행이 도착할 무렵 백제 12성을 공격하여 함락

  ② 진덕왕 : 김유신을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상주(上州)행군대총관에 임명

 ⑵ 김춘추

  ① 당에서 돌아온 다음 해(649년), 당의 제도를 본 따 관복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

  ② 649년 5월, 당 태종 사망

   ⓐ 조상(弔喪)을 겸한 사신을 장안으로 파견

   ⓑ 당 고종(이치) : 화목을 약속

 ⑶ 김유신 : 백제 공격을 물리침

 ⑷ 진덕여왕

   ① 당 고종에게 보낼 ‘태평송’을 친히 짰다.

   ② 100자에 이르는 글자를 비단 위에 짜 넣고 학과 용의 그림을 장식하는 데 꼬박 2달

   ③ 6월, 김춘추 : 맏이 법민으로 하여금 당 고종에게 태평송을 전하도록 하였고 이것은 신라의 외교 일반을 이미 김춘추가 장악했다는 방증

 ⑸ 김춘추

  ① 651년, 둘째 아들 인문을 장안에 보냈다.

  ② 관제개혁 시작

  ③ 국학 설립을 주청

  ④ 화랑도

   ⓐ 유·불·선을 포함하여 여러 종교를 조화한 국풍본위의 존재라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각 일문마다 승려가 배치되어 있을 만큼 불교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다.

  ⓑ 귀족 자제들로 형성된 사적인 전사단 : 귀족과 대립하고 유학을 지향하던 김춘추로서는 화랑도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 김춘추의 즉위

 ⑴ 654년 3월, 진덕여왕 승하

  ① 서라벌 귀족 : 알천에게 섭정 요구

  ② 상대등 알천 : 자청하여 김춘추에게 굴종

  ③ 서라벌 귀족 : 김춘추의 즉위를 요청

 ⑵ 654년 4월, 김춘추 : 왕위에 등극

 ⑶ 왕권강화에만 치중하다보니 김유신의 충성을 간과 : 김유신은 김춘추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한 감정은 1년 가까이 지속

 ① 655년, 고구려와 백제가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략 : 33개 성 함락

 ② 지소(문희에서 태어난 셋째 딸)를 김유신과 혼인 : 김유신과의 지속적인 결속을 꾀함

 ③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


12. 백제 협공

 ⑴ 김춘추 : 법민(첫째 아들), 인문(둘째 아들)을 연이어 당에 보내 원병 요청

 ⑵ 당 고종

  ① 소정방을 필두로 수륙병 122700여명과 배 1900여척을 으로 백제 침공

  ② 소정방에게 백제를 멸한 후에 서라벌을 공략할 것을 명령

 ⑶ 계백의 황산벌 전투 : 실패

 ⑷ 660년 7월 8일, 백제 멸망


13. 마지막 어가행렬

 ⑴ 660년 7월 29일, 무열왕 김춘추의 어가가 사비성에 도착

 ⑵ 소정방

  ① 김유신 등의 신라 장수에게 백제를 식읍으로 나누어 주겠다며 신라정벌을 회유

  ② 신라 장수들이 거절하고 전면전을 준비하자 전쟁을 통해 얻을 득이 없음을 알고 단념

 ⑶ 김유신 : 대각간에 취임

 ⑷ 백제 부흥군 격파

 ⑸ 고구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661년 6월 김춘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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