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동요란?
⑴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향가
⑵ 4구체
⑶ 향찰(鄕札)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⑷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 2 무왕(武王)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2. 배경 설화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서 살았으므로 국인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사’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시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다는 것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하여 금을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 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가 신력을 써서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3. 서동 설화의 역사 주인공은? 알 수 없다
⑴ 백제 동성왕, 백제 무왕, 신라 원효(元曉) 등
⑵ 서동설화를 ‘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취급 : 역사적 주인공은 백제 무령왕이지만, 그 설화상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
4. 신분제 사회의 엄격한 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백성의 소망이 문학적인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