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여(夫餘)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⑴ 고조선과 병존하였고 고구려, 백제 모두 부여를 자기의 뿌리로 인식
①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 시조 추모왕(鄒牟王), 곧 주몽(朱蒙)의 창업 기반이 북부여에서 나왔다
②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보낸 외교 문서 : 신(臣)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⑵ 위만조선 멸망후(기원전 108년) ~ 고구려 출현(기원전 37년)때까지 예맥문화권을 지탱하는 핵심적 세력
⑶ 기원후 5세기말까지 고구려와 더불어 동북아시아에서 우리 민족사 흐름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를 담당하는 역사적 실체로 존재
⑷ 만주 송화강 유역에서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예맥족 계통의 국가로서 출현 : 우리 민족사 영역을 확충하는 근간으로 존재
①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시조신화가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로서 동치(同値)되거나 활용됨으로써 단군신화와 함께 가장 중요한 문화적 근간을 형성
② 천손 신앙 개념의 원형으로서 일광신앙을 뚜렷이 보여줌으로써 중국과는 차별화된 문화적 계통성을 확립
⑷ 중국 학계
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강화
②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훼손하여 중국의 역사 주권 아래로 재구성하려고 시도
⑸ 국내 학계 : 상고사 및 고대사 인식 체계에서 부여는 고조선, 삼한, 삼국에 비해 상대적 초라한 위치
① 절대적인 사료 부족
② 시대적 제약
2. 부여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⑴ 부여
①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494년까지 북만주 땅에 있었던 예맥족 계통의 국가
② 약 700여년동안 만주를 주된 활동 무대로 하던 우리 고대 역사
⑵ 부여를 세운 종족
① 부여 건국신화 : 종족(주민집단)의 이주 전설
ⓐ 부여 시조는 동명(東明)
ⓑ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녀가 햇빛에 감응하여 출산한 자
ⓒ 성장후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滹水)를 건너 부여에 와서 왕이 됨
ⓓ 동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탁리국에서의 세력 갈등을 피하여 남하, 망명하여 송요 평원에 먼저 거주하고 있던 종족들이 이들 동명 집단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 형성
② 예맥족의 한 종족인 부여족
③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송눈 평원(송화강과 눈강 사이의 평원)과 송요(松遼) 평원(송화강과 요하 사이의 평원)을 개척
④ ‘서단산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 영위
⑤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 체제 마련
※ 동부여 : 고구려 건국 초기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285년 부여국 수도가 함락되었을 때 주민 일부가 북옥저 지역으로 옮겨갔다가 일부 세력이 북부여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남아서 세운 것
⑶ ‘부여’라는 명칭
① 그 나라가 위치하고 있던 만주 평야와 자연 지형을 염두에 두고 기원
② 평원, 강 이름, 산 이름 등에서 유래
③ 평야(부리, 벌), puhu(사슴)
⑷ 사출도
① 나라를 네 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했다는 뜻은 아니다
② 왕이 있는 도읍으로부터 사방에 통하는 길
③ 도로와 그 주변 고을
⑸ 경제 활동
① 주로 밭농사
② 집짐승을 기르는 목축(말) : 농가의 부업이상의 의미
③ 수출품 : 말, 옥, 담비(貂), 구슬(美珠) 등
④ 수입품 : 비단
⑹ 초기 부여 :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 ⇒ 동부여 ⇒ 고구려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 ⇒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즉 고구려 건국 ⇒ 압록강 유역에 먼저 살고 있던 주민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됨
⑺ 백제
① 왕실의 씨성 : 부여씨
② 동명묘 설치 : 부여 건국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③ 6세기 중반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 이름을 ‘남부여’라고 지칭
∴ 고구려, 백제 등의 예맥족계 국가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⑻ 발해
① 대조영
ⓐ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 발해의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았다
② 『무경총요』: 송나라 병서(兵書)
ⓐ 사료적 가치에 대해 아직은 논쟁중
ⓑ 발해가 “부여의 별종(別種)으로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
⑼ 왕이 강한 힘을 가지고 지방 사회를 통제하는 고대국가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체 국가 단계에서 멸망 : 부여사는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
① 중국 왕조와 자주 교류
② 선비족 같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고구려와는 세력 다툼
③ 동옥저, 읍루같은 부족 국가를 신하로 삼으면서 중국 동북 지방의 역사를 주도
④ 3세기후 모용선비같은 북방·서방 유목 민족과 남방에서 성장하는 고구려 틈바구니에서 세력 위축
3. 부여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⑴ 중심지와 강역(疆域) : 지금의 길림시, 제 2 송화강 중류역의 길림성 중부 지대
⑵ 기원전 2~1세기의 초기,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의 전기, 기원후 1~3세기의 중기, 기원후 4~5세기의 후기
① 초기 :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② 전기와 중기 : 사회 전반이 안정화
⑶ 4 신분, 3 계층
① 왕
ⓐ 국가를 대표
ⓑ 지배 계층
ⓒ 왕성에 거주하면서 정사(政事)에 임함
ⓓ 전기 : 군사적인 지도력과 귀족을 통합하는 능력이 부족할 때 왕 지위에서 축출
ⓔ 그 이후 : 부자 세습 체제가 강화되어 국가 상징으로서 화려한 생활
② 귀족(제가 : 諸加)
ⓐ 왕과 함께 넓은 의미의 통치 계급 형성
ⓑ 지배 계층
ⓒ 왕성 부근에 거치하면서 부여 경역 내 자신의 관할 구역을 관리
③ 호민
ⓐ 사회의 상층 구성원
ⓑ 중간 계층
ⓒ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 유사시에 대비하여 갑옷과 무기를 보유
④ 하호
ⓐ 사회의 하층 구성원
ⓑ 피지배 계층
ⓒ 생산과 부역을 담당 : 가난
⑷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
① 서단산 문화 : 길림 중부 지역의 토착문화로 돼지 숭상
② 부여 : 말 숭상
⑸ 부여 지배층
① 하호를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다
② 강력한 통치력 : ‘일책십이법’
③ 교역
ⓐ 요동군 및 현도군에 적절한 정치·군사적 이익을 제공
ⓑ 수입 : 중국에서 철 소재와 최신의 철제 무기와 공구, 그리고 사치품 수입
⑹ 생활 전반의 한화(漢化) : 후기로 갈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진행(특히 지배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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