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인의 선조는?
⑴ <광개토왕릉비>
① 추모왕(鄒牟王)=동명성왕(東明聖王 : 주몽)은 (북)부여에서 왔다
② 가장 원형에 가까운 고구려 건국신화
③ 고구려인 선조 : 기원전 1세기 이전에 (북)부여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
⑵ 『위서』고구려전 : 주몽은 부여에서 왔다
⑶ 『삼국사기』고구려본기
① 주몽은 동부여에서 왔다
② 졸본부여에 온 주몽은 아들이 없었던 왕의 공주와 결혼, 왕위 계승
⑷ 고구려 선조 : 북부여, 비류국, 행인국, 양맥, 구다국, 개마국, 갈사, 조나, 주나 등 압록강 중류 지역에 있던 작은 나라의 주민
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에 이미 고구려가 있었다
① 압록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집단 형성 : 고구려
② 기원전 75년경 현도군을 서북쪽(현 신빈현 영릉진)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정치적 결합체 형성 : 나연맹체(那聯盟體)
③ 주몽 등장
ⓐ 연맹체 주도 세력이 소노부 → 계루부
ⓑ『삼국사기』에서 주몽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표현
⑹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국가
① 고구려, 동예, 부여, 옥저 : 예맥족
② ‘각저총’ 그림(곰, 호랑이), ‘장천 1호분’ 그림(곰) : 단군신화가 고구려에 전승
③ 고조선, 고구려 주민은 예맥족 : 고조선 주민이 고구려의 선조
ⓐ 고조선 주민 일부가 압록강 중류의 고구려 지역으로 유입
ⓑ 고구려 지역이 고조선 영역
ⓒ 고구려가 요동, 낙랑군, 대방군을 점령한 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 유민이 고구려에 통합
ⓓ 부여 멸망후 부여 주민이 고구려에 통합
④ 예맥족이 뭉쳐 세운 나라
2. 주몽을 통해 본 초기 고구려왕의 성격
⑴ 한 국가의 이상적인 지도자 모습은 건국 시조 전승에 응결되어 전하는 경우가 많다
⑵ 활솜씨와 기마(騎馬) 능력
① ‘주몽’(朱蒙) : 부여말 ‘활을 잘 쏘는 사람’
② 궁시(弓矢) : 동이족(東夷族)의 대표적 무기
③ 기마 전술 : 기동성을 보장
④ <광개토왕릉비문>, 『위서』, 『삼국사기』등에 잘 나타난다
⑤ 『구삼국사』 동명왕편 :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었다”
ⓐ 채찍, 활 : 말을 빨리 달리게 하는 동시에 기마인(騎馬人) 최대 무기이자 필수 장비
ⓑ 위기 상황에서 주몽의 앞길을 열어 주는 데 사용
ⓒ 고구려인에게 삶을 열어 주는 방편인 동시에 생명과도 같았던 도구가 채찍과 활로 상징되는 내용
⑥ 비류국 송양왕을 굴복시킬 때도 활 솜씨 발휘
⑶ 초기 고구려왕의 성격과 풍모
① 주몽처럼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감별하여 명마(名馬)를 골라 타는 능력은 초기 고구려왕의 필수적인 조건
② 태자 책봉의 우선 순위
ⓐ 기사 능력, 군사적 역량
ⓑ 당시 고구려 사회가 필요로 했던 국왕의 모습이 추측된다
③ 왕의 풍모
ⓐ 강건한 체력
ⓑ 군사적 자질을 토대로 호전성
ⓒ 장대한 체격
3. ‘구려’(句麗)라는 명칭
⑴ 주몽(부여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이끄는 집단
① 비류수(혼강) 유력의 졸본(卒本 : 현 중국 길림성 환인)지역에 정착
② 소서노(召西奴), 모둔곡(毛屯谷) 집단과 연합하여 세력 확대
⑵ ‘구루’(溝婁) : 주몽 집단이 부여에서 압록강 유역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주변 요새지에 돌로 만든 성
⑶ ‘구루’에서 나온 명칭
⑷ ‘성을 잘 쌓는 사람’
⑸ 고구려(高句麗) = 왕실의 성씨인 고(高) + 구려(句麗)
4.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욕(榮辱)
⑴ 막리지
① 국정을 전제하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실권을 장악한 존재
② 막리지의 정치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기반 중의 하나 : 군사권 장악
③ 정원 : 다수
④ 대대로(大對盧) : 제일 높은 벼슬, 임기 3년) : 막리지에서 교대로 선출
⑵ 고구려는 귀족 연립 체제
① 대대로 - 막리지 형태
② 대대로, 다수의 막리지 : 정국 운영의 중심체,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귀족 회의체 구성
③ 대대로 : 귀족 회의체 의장
⑶ 연개소문 가문
①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 지위를 차지
②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대 여러 귀족 가문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보유
③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 가능성이 커짐 : 귀족간의 합의를 통한 귀족 연립 체제에서 귀족 전체 이익에 큰 위협
⑷ 연개소문 아버지 연태조(太祚) 사망후 왕(영류왕)과 다른 귀족 가문의 견제
① 연개소문이 아버지 자리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시도
② 연개소문을 변방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
③ 연개소문의 반격 : 보장왕 즉위
⑸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① 정변을 반대한 안시성 성주('양만춘'이라 하나 역사적 기록 사실로 확인되지 않음)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② 당나라와의 대외적 긴장 : 내내 정치 분쟁 확대를 주저하게 하는 요인
③ 반대파 귀족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어느 정도 인정
⑹ 사적 권력의 강화 : 귀족 연립 정권 정치 기반 붕괴
① 새로운 관직 신설, 취임 : 태대대로, 태막리지 등 - 종신직
② 아들 남생, 남건 : 대형, 위두대형 등 역임 - 연개소문의 핵심적인 세력 기반 조성
⑺ 귀족세력 이탈 : 당나라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의 하나
① 귀족세력 반발 : 연개소문 사망후 아들들의 권력 다툼과 당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표면화
② 남산, 남건에게 쫓긴 남생과 국내성 귀족 세력 : 6성과 10여만호 당나라에 투항
③ 서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신성 등 16성과 부여성 등 40여성 : 당나라에 투항
④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淵淨土) : 12성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
⑤ 귀족 세력간의 모순이 심화된 이유 : 기존의 귀족 연립 정권의 정치 운영 체제를 부정한 연개소문 가문의 파행적인 집권
5. 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였나?
⑴ 고구려의 최대 영역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⑵ 요동 방면 : 모용씨, 북위(北魏)와 충돌하면서 고구려 멸망때까지 지속
⑶ 백제 방면
① 『삼국사기』 지리지
② 한강 이남의 경기도 여주, 안성, 화성시 일대
③ 충청북도 진천, 음성, 괴산, 충주
④ 충청남도 직산
⑤ 6세기 초반까지 지속
⑷ 신라 방면 : 평양 천도(遷都)후 신라 방면 진출에 관심
① 대(對) 백제 전략의 일환으로 5세기이후 고구려 일방적 우위 아래 신라와 우호 관계
② 소백산맥 일대의 영월, 단양, 중원까지 진출
⑸ 낙랑군(313년), 대방군(314년) 축출
⑹ 4세기 후반 부여 지역 복속
⑺ 그 외 지역
① 서북쪽으로 진출하여 요하 상류 및 시라무렌 강 유역(내몽고 자치구)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거란 공격
② 숙신(목단강 동쪽, 연해주 일대) 복속
⑻ 5세기 중반 ~ 후반
① 동쪽, 북쪽 : 북부여, 동부여 지역 정복하고 거란 숙신 지역에 영향력 행사
② 서쪽 : 요동 지역 차지
③ 남쪽
ⓐ 백제, 신라를 공격
ⓑ 한강 유역 및 충청도 북부 지역과 소백 산맥 이남의 영일만 지역
6. 요동땅을 다 차지하다
⑴ 중국
① “고구려는 중국사에 속한다”
② 증거 : 요동땅은 주(周)가 기자(箕子)의 나라로 삼았고 한(漢)의 현도군이었다
③ 『사기』 송미자세가 :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⑵ 중국측 주장의 문제점
① 기자가 주나라 초기에 요동까지 왔을 리 없다
② 왔다고 하더라도 중국 사람을 조선 사람의 왕으로 받아들였을 리 없다
③ 요동을 기자의 나라로 삼았다는 기록과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을 연결시켜보면, 기자가 오기 전에 요동에 이미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있었고 그 조선에 기자를 봉하였던 것이 된다
④ 기자가 책봉되어 오기 전에 요동 지역에 있던 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일 것이다
⑤ 요동은 본래 단군왕검의 고조선 땅이었던 것이다
⑶ 고조선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다
① 『고려사』 지리지
ⓐ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한다
ⓑ 41대손 준(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이 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였는데 이를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한다
ⓒ 왕험성의 험(險)은 검(儉)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곧 평양이라 하였다
② 단군왕검의 ‘왕검’ = 왕험성의 ‘왕험’
③ 왕험성 = 왕검성
ⓐ 단군왕검이 거주하면서 통치 행위를 했던 성(城)에서 유래된 명칭
ⓑ 『사기』, 『한서』, 『삼국유사』
④ 『한서』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險瀆縣)
ⓐ 응소(應劭) : 조선 왕의 옛 도읍
ⓑ 『괄지지』, 『정의』 : 평양성
→ 천도(遷都)에 따라 도성의 이름도 옮겨 온 것
ⓒ 요동 험독은 단군조선의 치소(治所), 평양성은 위만조선의 치소
⑤ 고고학적인 증명 :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고인돌, 비파형 동검
ⓐ 요동이 청동기 시대에 이미 한반도와 같은 문화권
ⓑ 단군조선은 이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요동 지역에 건립된 국가
∴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이 아니라 조선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것은 중국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은 것
7. 좀 다르지만 우리도 고구려 사람 : 말갈(靺鞨)
⑴ 말갈, 그들은 누구인가?
① 수·당과 고구려 전쟁 과정에 자주 눈에 띈다
② 고구려 부흥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 당나라는 보장왕을 요동에 보내 유민을 통치하고자 했으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내통하여 고구려 복국(復國)을 도모 :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 요서 영주(營州)로 끌려감
ⓑ 696년 거란인 이진충(李盡忠)의 반란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탈출, 지금의 돈화 지방에 발해 건국
③ 발해
ⓐ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국임을 밝힘
ⓑ 역사, 문화,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부흥국
④ 우리가 알고 있는 말갈
ⓐ 나중에 여진족으로 불리는 종족
ⓑ 만족(滿族)의 선조
ⓒ 금나라, 청나라 건국
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고구려 건국때부터 말갈 등장
ⓑ 말갈 종족 계통에 관한 일을 후대에 일괄 소급하여 통칭(通稱)한 것
ⓒ 진말갈(眞靺鞨)
ⓓ 백두산과 송화강,, 흑룡강, 연해주의 삼린 지대나 오지에 거주하던 산림족
⑥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신라 본기 : 대부분 위말갈(僞靺鞨)로서 동예(東濊)
⑦ 중국 사서
ⓐ 『북제서』(北濟書)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2년(563)에 처음 등장
ⓑ 『수서』(隋書)단계에 이르러 독립된 열전(列傳)이 설정
⑧ 말갈 계보
ⓐ 『구당서』(舊唐書) 말갈전 : “말갈은 곧 숙신(肅愼)의 땅이다. 후위(後魏)때에는 이를
물길(勿吉)이라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 :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후위때에는 물길로도 불리었다”
ⓒ 중국 정사(正史) : 고대의 숙신 → 동한(東漢)의 읍루 → 원위(元魏)의 물길 → 수당(隋唐)의 말갈 → 금(金)의 여진
- 명칭, 언어적 관련성을 찾기 힘들다
- 거주 지역, 분포 범위가 다르다
- 숙신, 읍루, 물길 사이에는 위치, 종족 계통에 대해서 논란이 심해 계보 설정이 의문
- 한 개의 종족 집단이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 명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⑵ 호시(弧矢)와 석노(石砮)로 대변된 종족
①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은 몇 가지 특징적인 문화 요소 공유 : 시기차가 큰 ‘여진’ 제외
② 반농반수렵(半農半狩獵)의 산림족 : 예맥족은 농경족
③ 반지하식 수혈 주거(竪穴住居)
④ 특산물 : 초피(貂皮, 돈피), 돼지(매우 중요한 가축), 호시(弧矢), 석노(石砮)
⑤ 자연환경이 열악해 주로 약탈에 의존
⑥ 숙신 : 목단강 유역 정치 세력
⑦ 읍루 : 목단강 유역에서 장백산 주변 및 연해주 일대 정치 세력
⑧ 물길 : 훗날 속말말갈 거주 지역인 제 2 송화강 연안 지역과 그 북쪽 아성(阿城)지역 정치 세력
⑨ 말갈 : 위 지역 모두 포함하되 서북과 동북 지역으로 더 확대된 지역의 정치 세력
⑩ 중국 사서에 나오는 말갈
ⓐ 숙신, 읍루, 물길 등의 후손이 중심을 이루되 그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까지 포함
ⓑ 백돌갈말, 속말말갈 : 물길과 부여의 후손이 섞여 있었다
ⓒ 백산말갈 : 읍루와 옥저의 후손이 섞여 있었다
ⓓ 말갈 : 일종의 범칭(泛稱, 汎稱) = 말갈계 종족
⑶ 고구려와 말갈계 종족과의 깊고도 긴 인연
① 7세기 이전
ⓐ 동북 만주 일대에는 중국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 부여, 고구려 : 말갈계 종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세력
② 3세기 이래 말갈계 종족 : 송화강-연해주-흑룡강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에 거주
③ 5세기경 고구려
ⓐ 서쪽 : 요하(遼河)
ⓑ 서북쪽 : 심양(瀋陽)
ⓒ 북쪽 : 길림(吉林)과 영안(寧安)을 잇는 선
ⓓ 동쪽 : 훈춘(琿春)
ⓔ 남쪽 : 아산만(牙山灣)에서 죽령과 계립령을 넘어 영덕에 이르는 지역 → 말갈 거주지와 고구려 영역은 만주 일원에서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겹치고 있다
④ 6·7세기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 고구려 군대와 말갈족 군대 활동상은 대규모적이며 일정한 지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⑤ 『구당서』 말갈전 : 수·당시대 말갈 7부 가운데 흑수부를 제외한 6부는 고구려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지배를 받았거나 그 세력 범위에 있었던 백산부(白山部), 골돌부(汨咄部), 안거 골부(安居骨部), 호실부(號室部) 등이 정치적 힘을 잃고 분산미약(奔散微弱) 그 존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 발해가 성립되자 점차 발해로 편입되었는데 오직 흑수부(黑水部)만이 전성(全盛)했다
⑥ 고구려와 말갈계 종족과의 만남 : 동명성왕 창업기에 이미 이루어졌다
ⓐ 말갈 부락과 땅이 이어져 있어 초기에는 말갈족을 두려워했다
ⓑ 말갈족 침략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갈족도 다시 침범하지 않았다
ⓒ 고구려가 주변 작은 나라를 통합할 때 백수산 일대에 거주하던 말갈족 일파도 고구려 세력권 아래로 들어왔다
ⓓ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차지하면서 송화강 유역에 살던 부락도 영역안에 편입되었다
⑦ 백산말갈
ⓐ 거주지인 백두산 일대가 고구려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1세기 이래부터 고구려 영역에 속하였다
ⓑ 다른 지역보다 고구려 지배가 더 지속적이고 안정적
⑧ 속말말갈
ⓐ 서천왕때부터 일부가 고구려 세력안에 들어왔고 4세기 이후 부여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그 주변 지역도 고구려에 편입
ⓑ 고구려 지배에 모두 순응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부여·고구려에 익숙
⑨ 백돌부, 안거돌부 :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재차 장악하고 치치하얼 부근과 아륵초객하(阿勒楚喀河) 연안까지 활동 영역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권 아래로 편입
⑩ 불열부, 호실부
ⓐ 고구려 세력 침투가 언제 행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고구려의 동북 방면으로의 확장 과정에서 그 세력권 아래로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
∴ 속말부 말갈, 백산부 말갈 :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향
불열부 말갈, 호실부 말갈 : 고구려의 간접적인 영향
백돌부 말갈, 안거골부 말갈 : 중간 정도
흑수말갈을 제외한 6부 말갈은 모두 고구려의 직·간접적인 지배권 아래에 있었던 존재
⑷ 말갈이 대(對)중국 항쟁에 나서고 고구려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이유?
① 고구려의 말갈 통치 방식
ⓐ 필요에 따라서 직접 통치
ⓑ 대부분 말갈족 기존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상태에서 간접 통치
ⓒ 속말 말갈, 백산 말갈이 가장 핵심적
- 고구려 영역안에 들어와 살게 된 시기 자체도 오래되었고 지려적으로 가까웠다
- 군사적 의무에 충실
② 중국 역사서
ⓐ 말갈군을 고구려군과는 별개의 군대인 것 처럼 ‘고구려와 말갈병’식으로 표현
ⓑ 말갈군 : 고구려가 동원한 용병
ⓒ 문제점 : 용병이라면 나라가 망하는 순간, 멸망후에 복국(復國)을 도모하지 않을 것
③ 말갈군 : 고구려 사람으로서 그들만으로 구성된 특수 부대에 속해 있던 사람
→ 건국 주체 세력이자 주구성원인 예맥족과 마찬가지로 말갈족도 고구려 사람
④ 발해 멸망이후부터 말갈
ⓐ 우리 역사와 거리가 멀어졌다
ⓑ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금·청을 건국 : 완전히 중국사가 되었다
⑤ 고구려, 발해시대의 말갈 :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
⑥ 고구려 : 종족 계통이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고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도 함께 살았다. 즉 넓은 영토에 다양한 구성원을 포괄하고 있던 다종족 국가(多種族 國家)
ⓐ 예맥족 :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
ⓑ 한족(韓族), 선비족(鮮卑族), 한족(漢族), 거란족(契丹族) 등
ⓒ 신분상 차이가 있고 생김새와 사는 방식이 달라도 모두 고구려 사람
ⓓ 말갈 : 단연 두드러진 존재
∴ 고구려
- 다른 종족에 대해 배타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았다
- 신분제 사회이고 예맥족 중심인 나라 : 차별은 있었으나 다른 왕조에 비해 열린 나라
8. 고구려 최대 스캔들,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⑴ 『삼국사기』 온달전
①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② 계립령 : 오늘날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
③ 죽령 :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
④ 삼국간에 쟁패가 치열하였던 전략적 요충지
⑵ 아단성 위치
①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 : (근거) 신라와 고구려의 충돌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
②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 현재 좀 더 지지를 얻고 있다
ⓐ 고구려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
ⓑ 계립령과 죽령이 가깝다
ⓒ 온달 관련 전승이 이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⑶ 온달은 실존 인물인가?
①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을 얻기 어렵다 : 역사상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② <온달전>
ⓐ 평강공주와 결혼
ⓑ 매년 3월 3일에 치러지는 춘계 수렵 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평원왕의 눈길을 끌음
ⓒ 북주(北周) 침입때 큰 공을 세움
ⓓ 대형(大兄) 벼슬과 정식으로 부마(駙馬)로 인정
ⓔ 영양왕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
③ 당시 고구려가 처했던 국제 정세를 보면 온달의 행적은 충분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⑷ 온달은 과연 공주와 결혼하였는가?
①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 인물이라면 그가 평원왕의 부마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② 온달은 가난한 평민 출신도 명문 귀족 출신도 아니었다
ⓐ 이 설화의 핵심 : 온달과 평강공주와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
ⓑ 명문 출신이라면 이러한 설화가 만들어질 이유가 없다
ⓒ 평민 출신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평원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출신이 낮았을 것
ⓓ 왕실과의 통혼권에서 벗어나 있던 하급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
- 7위에 해당하는 ‘대형’ 벼슬에 오름
③ 신라 김유신 아버지 서현과 왕족인 ‘만명’의 연애, 결혼 : 서현이 가야 왕족 출신 진골이었다는 점에서 온달의 경우와는 다르다
④ 온달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
ⓐ 설화에는 결혼후 무훈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
ⓑ 귀족들이 수긍할 만한 뛰어난 공을 세움으로써 파격적인 결혼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⑸ 온달 설화의 역사적 배경
① 4세기~6세기에 걸친 시기에 삼국 사회에는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② 철제 농기구, 우경(牛耕)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
③ 상업, 수공업 : 급속도의 진전
④ 사회 분화 촉진 : 몰락한 계층 및 새로운 부민층(富民層) 등장
⑤ ‘(평강) 공주의 금팔찌를 팔아 집과 전답(田畓)은 물론 노비와 우마(牛馬)까지 마련’
ⓐ 고대 사회 초기 : 황금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최고 신분층(권위와 위엄)의 상징
ⓑ 온달 설화 탄생 시기 : 교환 가치를 지니는 재화로서 경제적 가치가 보다 중요
⑥ ‘온달이 무인출신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 새로 성장한 부민층 : 정치적 진출과 성장도 추구
ⓑ 지배 체제 개편을 꾀하던 왕권은 관료 체제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과 결합을 시도 : 어느 정도는 정치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 관료로서 기본적인 소양 필요 : 『구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경당’에서 담당
ⓓ 경당에서 중심이 되었던 사람 :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층
⑦ 온달 설화 :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사회 분위기속에서 형성
9.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여성 모습
⑴ 고구려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다른 시대와는 다르다
⑵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의 행렬도가 많다 : 자유스러운 문화가 발달
⑶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 8월조(條) : ‘국내의 15세 이상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공공 부역을 담당
② 사회 생활에서 여성의 일정한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
⑷ 부부를 함께 그린 장면이 많다 : 고구려의 남녀 지위를 엿볼 수 있다
⑸ 죽어서도 영원한 삶을 함께 추구하는 그림이 많다
⑹ 남자(남편)와 나란히 여가를 즐기는 여성 그림이 많다
∴ ① 고구려 여성은 상당히 활발하고 적극적이며 여유있는 일상 생활을 구가
② 사후(死後) 내세관(來世觀)에서는 부부가 함께 영원한 삶을 기원 : 고구려 사회의 남녀 양가적(兩家的)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10.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역사 왜곡, 그 저의(底意)는?
⑴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를 흔들고 심지어 송두리째 빼앗아 가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
⑵ 가장 큰 문제점 : 우리 나라 고대사(고구려, 고조선, 발해 등)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
⑶ 고구려가 중국 영역내의 민족 <문제점> 고구려 주민은 예맥족
⑷ 고구려 활동 중심은 한사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문제점>
① 그 이전에 이미 고조선이 있었다
② 한사군은 그 지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였다
③ 중국에서도 인정
⑸ 고구려가 중국 역대 왕조와 군신 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 <문제점>
① 조공, 책봉 :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적용된 외교 형식
② 조공과 책봉을 근거로 고구려만을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
③ 중국이 백제, 신라, 왜 등과 맺었던 조공 책봉 관계와 차이가 없으며 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
⑹ 고구려 멸망후 그 주체 집단이 한족에 융합 :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 민족 정권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 고려 및 조선족을 혼동해선 안된다 <문제점>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 신라로 떠난 사람, 대부분은 고구려 지역에 남아 발해 주민으로 살아갔다
⑺ 고구려의 고(高)씨와 고려의 왕(王)씨는 혈연적으로 다르고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적 계승성이 없다 <문제점>
① 중국 왕조는 한족과 북방 민족의 왕조가 번갈아 가며 중원을 차지하였고 한족 왕조도 모두 다른 성씨이므로 역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하는가?
② 왕조 계승은 혈연적 계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계승성이 중요
③ 중국이 주장하는 논리대로 한다면 중국 왕조는 서로 하나도 연결되지 않아 전혀 계승성이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⑻ 처음에는 고구려 역사 중 평양 천도 이전은 중국 역사이고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 역사라고 주장하였는데 지금은 고구려 역사 모두를 중국 역사로 왜곡
⑼ 역사 왜곡 작업(동북공정)을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목적은?
① 남북한에서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분석하여 그러한 역사가 중국사의 일환임을 주장할 수 있는 대응 논리를 개발
② 남북 통일이후 나올 수 있는 국경·영토 분쟁에 미리 효율적으로 대비하려는 목적
③ 자기들의 대응 논리를 조선족 사회에 주입시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예방하는 동시에 중화 민족이라는 논리를 강화
④ 그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남북 통일이 중국 동북 지역 또는 조선족 사회에 미칠지 모르는 영향을 분석, 미리 대처함으로써 동북 사회의 안정을 유지
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소수 민족 문제의 돌출과 확대를 차단 : 중국의 국가적 안정을 꾀하려는 거시적(巨視的) 정책과 직결(直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