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장 :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발해왕이 발해군왕으로 책봉방고 홀한주도독이 된 것을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공·책봉은 명분과 실제가 다른 전(前)근대시기 외교관계의 한 형식일 뿐이다.
발해가 당의 속국이나 지방정권이 아닌 자주 독립국가였다는 것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 사용, 하늘의 자손이라 칭한 점, 황제라고 자처한 점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에서도 당연히 발해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하여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발해인들이 응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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