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장 : 오랜 옛날부터 백두산이 아니라 중국의 산, 창바이산(長白山)이다.
중국에서는 2005년 지린 성 직속 ‘창바이산보호개발관리위원회’ 설치를 계기로 창바이산 관광자원 개발과 세계 유산 등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창바이산 일대는 1986년 이래 ‘국가급자연보호구’(國家級自然保護區)로 지정·관리되었으나 2005년 이후 중앙정부와 성정부의 협력 이래 창바이산을 ‘중국국가자연유산’에 올리고 창바이산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등 창바이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공항·철도·고속도로 등 기반시설을 확충하여 창바이산에 대한 접근도를 높이고, ‘창바이산 인삼’, ‘창바이산 광천수’, 고속열차 ‘창바이산호’와 같이 창바이산 명칭의 브랜드화에 앞장섰다. 나아가 중국에서는 ‘창바이산 문화론’을 통하여 창바이산 일대는 중국 고인류가 발생하고 중원왕조의 지배 아래 여러 민족들이 살아온 중국의 영역이며 이들 민족들의 교류·융합을 통하여 형성된 창바이산 문화는 중화문화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21세기 들어 새삼 창바이산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창바이산 문화론’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2003년부터 본격화된 ‘동북진흥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동북지역 국유기업이 노후화되어 지역간 격차의 불균등이 심화되자 중앙정부에서는 동북지역 경제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로써 ‘동북진흥전략’을 추진하였다. 국유기업 개조, 산업구조 선진화, 대내외 개방 확대 등의 슬로건을 내걸은 ‘동북진흥전략’은 동북지역을 새로운 산업중심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자금 및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인적 요소의 동원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데, ‘창바이산 문화론’은 인적 요소의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창바이산 문화론’은 동북지역 사람들을 중화민족의 인원이자 경제개발의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창바이산 문화론’은 백두산 또는 창바이산으로 불려온 산에 대한 역사적인 관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갈등 소지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두산/창바이산은 약 1000여년 동안 양국이 공유해 온 공동 유산이었다. 한국에서 백두산 명칭이 처음 출현한 것은 10세기 말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을 ‘나라의 조종산(祖宗山)’이자 ‘왕조의 발상지’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 중국에서 창바이산 명칭이 등장한 것은 11세기 초이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장백산은 냉산(冷山) 동남쪽 천여 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金)나라 때부터 ‘왕조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제사를 지냈고 청나라때에는 장백산신(長白山神)으로 봉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백두산/창바이산은 양국이 공유해 왔으며, 15세기 이래 양국이 경계로 삼은 산이었다. 1712년 조선과 청의 경계를 정하기 위하여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 동남쪽 기슭에 세웠을때에도, 1909년 ‘간도협약’으로 백두산정계비와 석을수(石乙水)를 경계로 한다고 확정되었을때에도, 1962년 체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종변제조약’으로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 천지를 55:45로 분할했을 때에도 백두산/창바이산은 어느 한쪽에 귀속된 산이 아니라 서로가 공유하는 산이었다.
* 간도협약 : 청·일전쟁 직후 통감부간도파출소(統監府間島派出所)를 설치하고 간도문제에 개입한 일본이 1909년 청국과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 제1조에 ‘중·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을 중·한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江原)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경계를 삼는다’라고 되어 있다.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만주점령을 위한 교두보 구축에는 실패했지만, ‘간도조선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 조중변계조약 : 1962년 중국과 북한이 맺은 국경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백두산 천지의 분할 및 압록강·두만강 상 섬들의 분할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었고, 1964년 ‘중·조 변계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국경문제가 종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변계의정서에 따라 백두산 천지는 북한이 55% 중국이 45%를 차지하였고, 압록강·두만강 상의 섬과 사주(沙洲)는 북한 264개, 중국 187개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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