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장 : 발해(渤海)의 국호(國號)는 말갈국(靺鞨國)이었다.
옛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은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698년 동모산(현재 중국 지린성 둔화시)에서 발해를 세우고 진국왕(振國王)에 등극했다. 8세기 초 발해는 국가발전을 위해 당과 친선관계를 맺었고 당도 정책을 바꾸어 발해를 인정하고 교섭을 하였다.
중국 사서(史書)인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당 예종 2년(713)에 최흔(崔訢)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발해의 국호가 원래 말갈이었다고 주장한다. 최흔이 말갈사(靺鞨使)라는 직함을 가지고 갔다고 나오는 홍려정비(鴻臚井碑)도 근거를 들고 있다.
그러나 말갈사라고 한 것은 최흔이 방문한 발해의 수도가 말갈족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라는 의미일 뿐 발해의 국호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말갈’이나 ‘발해’는 당나라 사람들이 불렀던 호칭이다. 발해 사람들은 자기들 나라를 처음에는 진국(振國, 震國), 8세기 중반 경에는 고려 혹은 고려국이라고 불렀다. 발해는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하여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758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은 당시 왕인 문왕을 ‘고려국왕’이라고 했고, 이듬해 일본 조정이 문왕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문왕을 ‘고려국왕’이라 호칭했다. 발해인들도 ‘발해’라는 국호를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은 9세기 이후일 것이다.
이런 사료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에서 발해의 국호가 ‘말갈’이었다가 ‘발해’로 개칭(改稱)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고구려와의 계승관계를 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왜곡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도 슬며시 인정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중국측은 필요에 따라 논리를 바꾸고, 자기들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만 선택하는 비(非)역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홍려정비(鴻臚井碑) : 713년 발해를 방문하고 돌아가던 최흔이 오늘날 랴오닝 성 뤼순 황금산 부근에 기념으로 만든 우물옆에 세웠던 비석이다.
* 발해가 독립국가였던 분명한 증거
⑴ 발해는 인안(仁安)을 비롯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⑵ 전왕(前王)에 대한 시호(諡號)를 스스로 정하고, 문왕은 자신을 대왕, 성인, 황상(皇上)이라 하였다.
⑶ 당으로부터 새롭게 책봉받기 전에 신임 왕이 국정을 담당하였다.
⑷ 당나라가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발해인이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⑸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천손(天孫)이라 하고, 주변의 말갈족을 번국(藩國)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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