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요 논리
(1) 일제 강점기 하에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주장 : 수탈을 부정
(2) 조선후기 사회가 생산력의 붕괴와 더불어 자멸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있었다.
(3)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근대적인 여러 제도가 도입되고 선진적인 자본이 대거 투입됨으로써 조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인들의 생활수준도 향상
(4) 이러한 식민지적 개발의 경험과 유산이 해방 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
→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근대적) 경제 성장이 전혀 불가능해서 어떤 외부적 충격 없이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던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식민지 지배가 그 외부적 충격이 되었다고 주장
(5) 조선말 일제 초의 경제성장이 V자 곡선 : 급하락하다가 성장세가 급 회복되는 양태 (근거) 1910년 이후 조선의 GDP 추계
2. 일제 강점하 조선에서 농업 생산력은 과연 폭증하였는가 : GDP 추계[자료]의 문제
(1) 1910년대의 GDP에 대한 공식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 당대 산업 생산에 대한 자료 입각하여 계량경제학적으로 추계하는 수밖에 없다
(2) 조선은 농업 국가 : 당시 농업 생산의 규모에 대한 통계가 추계를 내는 데에 있어서 핵심
(3) 당시 농업 생산 규모에 대한 자료 자체조차 변변찮다
(4) 조선총독부 : 1909년부터 농업통계를 진행
(5) 토지조사사업 : 1918년에야 완성
① 1918년 이전의 조선총독부 통계 : 매우 부정확한 내용을 포함
② 이 시기에 농업생산이 폭발적으로 일어날만한 이유도 딱히 없다 : 조선총독부가 농업개발정책에 열을 올린 것도 1920년 산미증식계획에서 시작하기 때문
(6) 산미증식계획과 겹치는 시기인 1918~1929년에는 농업 생산이 그닥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
① 식민지근대론 주창자(김낙년)도 인정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김낙년 편, 2006)
② 1910년대 초반에 조선에서 급속한 (농업)경제성장이 일어났을 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1930년대까지 식민지에서 급속한 개발이 이뤄졌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
③ 조선의 GDP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농업 : 이 시기 농업 생산의 폭증을 입증해야만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의 과학성이 보장
(7) 이영훈
① 다른 통계를 바탕으로 이 시기 급속한 농업 성장이 있었다고 주장
② 20세기 초반 조선에서 두락당 지대량이 급속히 증가 : 이 시기 농업 생산이 폭증
→ 이 통계 역시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3. 이영훈에 대한 반박
(1) 지대량이 농업생산력에 비례하는 것이라면 조선 중기의 농업생산력이 오히려 일제 강점기 하에서의 농업생산력보다 우월
① 그가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1685년~1760년까지의 지대량이 1935년의 지대량보다 많기 때문
② 원자료의 편향성 문제
(2) 경상도 : 지대량이 1685년에서 1945년까지 별다른 변화가 거의 없다
(3) 전라도 : 지대량이 V자 곡선
① 전라도 농업 생산력은 조선 후기에 붕괴하다가 20세기 초에 급회복되었다?
② 1815년 이전 전라도에 관한 데이터는 한 가문의 지주(영암 남평문씨)의 지대 수취 기록에 근거
③ 이 한 가문의 데이터만이 예외적인 V자 패턴 : 이 데이터를 전라도 전체의 데이터로 일반화
→ 하나의 특이한 사례가 분석결과에 큰 왜곡을 초래할 가능성에 있다면 회귀분석에서는 당연히 제외
(4) 지대량을 토대로 농업의 생산력을 측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① 19세기를 전후로 지대수취 관행이 크게 변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② 지대수취의 기준이 변화하면 지대량에 변화가 생길 수가 있다
③ 스스로 이 시기 농업생산이 급증할 합리적 이유는 적어도 사료에 따르면 아무 것도 없다고 지적
(5) 농업 투입 증가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수준
① 농업 생산이 증가했다면, 이는 오직 우량품종 보급의 효과
② 1910년부터 몇 년간은 우량품종 보급률의 급증과 함께 미곡생산량이 얼마간 증가하는 시기가 있었다
③ 1914년 이후에는 우량품종 보급률은 급증하고 있었음에도 전체 평균 미곡생산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쉽게 입증할 수 있는 부분
→ 우량 품종이 보급으로 인한 미곡생산 증대를 쟁점 삼아 이영훈 주장을 재비판하던 식민지 근대화론 측 김낙년 반론은 근거를 잃는다.
[소 론]
① 1918년 이전 조선의 농업 생산이 폭증했다고 볼만한 근거는 그다지 없다
② 1930년대 이전의 식민지 조선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증거 또한 사라진다
③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경제가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식민지 시절 중에는 후하게 봐줘야 10년 정도가 유의미한 경제성장이 이뤄진 시기
4. 식민지 근대화론자 주장 : 일제 초기에 이루어진 관개 시설이 정비로 인해 1910년대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
(1) 제시하는 시설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조선시대에 이미 만들어진 시설
(2) 192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만들어진 구조물
(3) 시설 정비로 인해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그들의 주장 또한 실증적 근거를 잃는다
※ 식민지 근대화론자(이들 대부분 시장주의적 성향의 경제학자) 사유재산과 시장경제 관련 제도가 일제강점기 때 처음 도입되었다는 점을 강조 : 이러한 제도가 경제성장에 큰 영향
① 미 군정 또한 사유재산제도를 조선에 이식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
② '제도적 유산'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③ 시장주의자들에게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 관련 제도의 정착이 경제성장의 근본동력이라는 점이 합의사항인가?
④ 시장주의적 경제학 가설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 일제가 '제도적 유산'을 남겼더라도 그런 요인들이 경제성장에 도움을 줬다고 보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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