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사건? ① 7년 7개월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건 ②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2000년 1월 제정> :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1. 제주 4.3사건은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1절에 벌어진 작은 사건에서 시작
(1)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끝난 뒤, 주민들은 가두시위 : 2만5000~3만명으로 추산
(2) 오후 2시45분경, 기마경찰이 타고 있던 말의 발굽에 한 어린이가 채이는 일이 발생
(3) 기마경찰이 그냥 가려 하자 군중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
(4) 기마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때 총성이 울렸다 :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발포
(5) 민간인 6명 사망, 6명 중상 : 희생자 6명 중 5명은 등뒤에 총탄을 맞았다.
(6) 경찰당국 : 과잉진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발포는 불가피했다며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면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 즉 민심수습이 아닌 강경대응으로 맞선 것
2. 그들은 제주도에 ‘빨갱이섬’ 딱지를 붙였다
(1) 해방 이후 제주도 : 좌익 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
(2) 1947년 3·1절 기념행사 :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위원회가 주도
(3) 제주 주민 : 미군정에 큰 불만 → 민심 흉흉
① 제주도를 떠나 있던 6만명이 한꺼번에 돌아왔지만 일자리는 부족
② 1946년, 콜레라 발병 : 제주도에서만 수백명이 사망
③ 극심한 흉년에 따른 식량난
④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체제’는 농민들이 크게 반발
⑤ 밀수선 단속에 나선 경찰 고위간부와 미군정 장교의 뒷거래 의혹
(4) 경찰 : 3월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 시행
(5) 좌익진영 : 3월10일 제주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
① 도청 직원, 현직 경찰관까지 동참했을 정도로 전면적인 파업
② 우익 진영도 가담
③ 발포 책임자 처벌, 경찰의 무장 해제 및 고문 폐지, 희생자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
(6) 미군정 : 탄압으로 대응
① 미군정,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② 경무부장 조경옥 : 3·1절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니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3. 누구도 이 거대한 비극을 예상하지 못했다
(1) 제주도에 ‘육지’ 경찰이 들어와 제주 경찰관을 밀어냄
(2) 경무부 : 파업 주동자 검거
① 수백명에 달하는 연행자 취조 : 육지에서 온 경찰이 담당
② 고문이 자행된다는 소문
③ 1947년 3월, 6월, 8월 :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
(3) 미군정 : 고위 관리들을 우익 인사들로 교체
① 제주경찰감찰청장 : 서울 출신
② 제주도지사 : 전북 출신
③ 군 수뇌부 교체
④ 제주 출신 완전히 배제
(4) 유해진 도지사
① 미군마저 ‘극우파’로 표현
② 대규모 숙청 단행
(5) '육지 경찰', 반공극우단체 '서북청년회' : 파업 주동자 검거에 동원
(6) 1948년 1월, 남한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로 전국적으로 격렬한 갈등
① 반대하는 이 :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영구 분단되는 것으로 보고 좌파 진영 뿐만 아니라 우파 진영에서도 반대 대열에 가세
② 남로당 : 단독선거 저지를 위한 2·7 총파업을 전국적으로 조직
③ 제주 곳곳에서 시위 발발
④ 경찰 : 대규모 검거, 탄압
(7) 제주 남로당 :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투쟁을 결의
① 중앙당 지시없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일
② 남한 단독선거로 치러질 5·10 총선거 반대 등을 명분으로
③ 상황 오판 : 제주도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진압병력이 제주도에 추가 투입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
④ 경찰과 서북청년회만을 무력투쟁 대상으로
⑤ 경비대 또는 미군이 나설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 300여명의 무장대가 총과 칼, 죽창 등을 들었다.
(8) 사태초기의 미군정
① '치안 상황'으로 간주
② 5·10 총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빈발했던 무력 충돌 중 하나로 파악
③ 경비대 : 도민과 경찰·서북청년회 사이의 충돌로 여겼을 뿐, 군이 개입할 사건은 아니라고 봤다
→ 사태는 점점 격렬하게 전개
4. 미군정 : 4.3 무장봉기를 대대적으로 진압
(1)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
① 350명의 무장대 : 경찰서와 우익단체 등을 습격
② 이날 하루 동안 수십명 사망이
③ 이후 6년 6개월 동안 이어진 비극적 유혈사태의 출발점
(2) 경찰 : "육지 불량배들이 도민을 선동했다"
(3) 미군 : "북한군 유입설" 제기
(4) 평화협상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곧 무산 : 미군정이 무력진압을 결정
① 더 많은 육지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제주도에 파견
② 군에 진압을 명령
③ 우익 청년 : 오라리 마을에 방화
④ 미군정과 경찰 : ‘폭도들의 행위’로 조작 → 강경 진압의 명분으로
(5) 무장대 : 5·10 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투쟁 재개
① 다수 주민 : 이에 동조하며 선거 거부
②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받거나 관련자들이 피살
③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 선거가 무산된 선거구(2곳)이 나옴 : 미군정은 6월23일 재선거를 추진됐지만 이마저도 무산
(6) 미군정 : 중대한 사건으로 판단, 광주에 주둔하던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
① 제주에 파견돼 군·경의 진압작전을 총지휘
② 관련자 증언 :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천명
③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며 강력한 진압 작전을 개시
④ 경찰, 경비대, 해안경비대에게 각각 역할을 분담시켜 자신의 작전 방침을 피력
ⓐ 경찰 :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도로로부터 4㎞까지 사이에서 치안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
ⓑ 국방경비대 :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명령, 시행
ⓒ 해안경비대 : 하루에 두 번씩 제주도 일대 해안을 순회
⑤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 :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됨
(7)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
① 11연대장에 새로 취임한 박진경 :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② 무고한 민간인이 총살되는 일이 자주 발생
③ 토벌대 : 1948년 6월 중순까지 6000여명 체포
④ 주민 :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피신
⑤ 토벌 작전의 대상 : 이념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 이유 : 민간인과 ‘폭도‘를 구별하기 곤란하다
ⓑ 중산간마을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연행
5. 수많은 민간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다
(1) 이승만 대통령 : 1948년 11월, 제주도에 계엄령 선포
(2) 1948년 11월 ~ 1949년 3월
① 4.3사건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시기
②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
③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
(3) 토벌대
① 산으로 숨어든 무장대를 주민들과 분리하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
② 노인과 어린이 등 마을을 떠나지 않은 많은 주민 : 무차별 학살의 대상
③ 해안으로 내려온 주민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사살
(4) 주민
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신
② 발각되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5)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① 일부 마을을 ‘토벌대 편’으로 지목한 뒤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
② 심문도 재판도 없었다
(6)1949년 3월 설립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①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
② 산에 숨어 있던 많은 주민들이 내려옴
ⓐ 이들 중 상당수 : 죄명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이송
ⓑ 즉결 처형 : 2500여명
③ 무장대 총책, 이덕구 : 사살
④ 무장대 세력이 사실상 궤멸 :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7) 625전쟁 발발
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사건 관련자 : 즉결 처분
② 예비검속에 의한 희생자와 재소자 희생자 : 3000명으로 추산
③ 제주도 내에서도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등지에서 집단으로 수장되거나 총살, 암매장
(8) 1954년 9월 21일, 사건 종식
'우리 역사 이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마항쟁 (0) | 2019.07.12 |
---|---|
419 (미완의) 혁명 주요 일지 및 전개 과정 (0) | 2019.06.20 |
북한군 전차부대, 48km 진격에 사흘 걸린 이유 (0) | 2018.02.25 |
3일의 미스테리 (0) | 2018.02.25 |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한 이유 (0) | 2018.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