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光復節), 광복절은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 광복절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 8·15는 무엇이었나?


광복절이라고 하면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정말 우리가 기념해온 그 광복절에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8월 15일 이후에도 엄연히 계속됐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 땅에서 일제의 통치가 끝난 10월 25일을 광복절로 삼는 대만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의 광복절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의 항복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의 수락이 결정된 8월 14일 또는 일본군에 대한 정전명령이 하달된 8월 16일을 그 기점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 포츠담선언에 조인한 것은 9월 2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일전승기념일은 9월2일로 되어 있다. 일본과 싸웠던 옛 소련의 ‘대일전승기념일’과 중국의 ‘항일투쟁승리기념일’은 그 다음날인 9월 3일이다. 


만일 광복절이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땅을 통치해온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항복조인식을 거행한 9월 9일을 그 기점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8월 15일은 어느 시각에서 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는 우리의 광복절 또는 해방일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8·15는 대체 무엇이었나? 이날은 단지 포츠담선언의 수락 결정을 전하는 일왕의 조서(詔書)가 라디오로 방송된 날짜에 지나지 않는다. 일왕의 조서는 전쟁을 끝낸다는 ‘종전의 조서’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날을 ‘종전기념일’로 삼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날을 광복절로 삼은 것일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면서도 사실은 황국신민적 정신자세를 완전히 벗지 못해 그날 발표된 일왕의 조서를 높이 받든 역설적 행위는 아니었을까?


■ 일왕의 방송


흔히 8·15 자료로 많이 이용되지만 이는 미군이 진주한 9월9일 이후의 사진이다. Welcome이라는 플래카드는 미군을 환영한다는 뜻이다.1945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에는 “본일정오 중대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리고 12시에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 라디오로 중계됐다. 실제로는 14일 밤 도쿄(東京) 황궁에서 78회전의 아세테이트 SP판에 녹음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육성을 일본 NHK가 15일 경성방송국을 통해 조선에 중계한 것이었다.


정오에 한 번, 오후 2시에 다시 한 번 내보낸 이 방송을 직접 들었던 조선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라디오가 귀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급 라디오로는 RCA빅터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나무상자로 된 ‘(방송)국형123형’ 수신기를 썼는데, 이마저 조선에는 그렇게 널리 보급돼 있지 않았다. 요행히 라디오가 있어 방송을 들었다 하더라도 조서를 단조롭게 낭독한 히로히토의 코맹맹이 소리는 발음 자체도 명료하지 않은 데다 잡음마저 심해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경성일보종전시말기라는 책에는경성일보사장 요코미조 미쓰테루(橫溝光暉)가 “옥음방송이 잡음으로 똑똑히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강단에 올라가 동맹통신을 통해 입수하고 있던 ‘종전의 조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고 쓰여 있다.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비단 조선에서만이 아니고, NHK가 소재한 일본 도쿄에서도 청취하기 어려웠다고 기억하는 일본인의 회고물이 많다.


왜 그렇게 잡음이 심했던 것일까? 당사자인 NHK는 「방송 50년사」에서 “옥음방송에 잡음이 많고 내용을 청취하기 매우 어려웠던 것은 중계선의 감쇄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술적 이유를 대고 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대본영 발표 전황 뉴스 등은 아무런 잡음 없이 잘들렸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당일 일왕의 항복방송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방송국 관계자가 의도적으로 잡음을 집어 넣어 일반인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설령 잡음 없이 잘 들렸다 하더라도 이날 일왕이 낭독한 조서는 한학자 가와다 미즈호(川田瑞穗)가 기초한 한문투문어체여서 일반인들로서는 해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왕의 녹음이 방송된 뒤 와다 노부카타(和田信賢) 방송원이 경과를 설명하고 조서를 다시 낭독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일본 측 자료들이 전하는데, KBS가 발간한 한국방송 60년사」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경성방송국의 민자호 방송원(아나운서)이 일왕의 방송을 요약 해설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방송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이 조서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깨달은 조선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째, 당시는 오늘날처럼 일왕의 조서를 ‘일본이 패전한 것’이라고 분명히 짚는 ‘방자한’ 해설이 용납되지 않는 삼엄한 군국시대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800여 자의 조서 가운데 패전을 암시한 대목은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노라”라는 단 한 줄뿐으로, 조서 어디에도 패전이나 항복을 나타낸 부분이 없다. 조서는 자기들이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싸움으로 인한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생각해 스스로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는 종전(終戰)의 변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일왕의 녹음방송이 싸움이 끝난 것을 알리는 무엇이라는 정도는 파악하면서도, 전시의 언론통제하에서 히로히토가 미·영·중·소 4국에 그 수락을 알리게 했다는 ‘공동선언’이 바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이었다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한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패전과 종전은 사뭇 다른 것이다. 패전은 일제의 통치가 끝난다는 의미지만, 종전은 일제의 통치가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듯 방송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조선인들의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 조용한 8·15


그런데도 우리네 회고록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은 방송을 듣자마자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달려나가 태극기를 휘둘렀던 것으로 묘사해 왔다. 이는 사실이었을까?


해방 전 경성방송국 방송원으로 있다 해방 후 방송기자 제1호가 되었던 문제안 씨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증언했다.“요즘에 와서는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8월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리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문제안, 『이제부터 한국말로 방송한다』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서울 거리가 조용했다는 위 증언은 내가 적과 동지」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1980년대 8·15 유경험자들을 널리 취재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해방 당시 서울 교외의 한 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했다는 일본인 미즈모토 마사카즈(水本正和)도 “15일 저녁 나는 황금정 6정목(을지로6가) 부근을 전차로 지나갔지만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正論」, 2004년 8월호, 도쿄, 일본)고 회고했다. ‘혼란’이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조선인의 소요 같은 것을 가리킨 단어로, 그는 평시와 같이 운행되는 전차를 타고 을지로를 지나갔지만 거리는 평온했다는 것이다. 해방됐는데 왜 거리는 그처럼 조용했던 것일까?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왕의 방송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는 점이다.


둘째는 혹 그 의미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36년 동안 일제 치하에 억눌려온 조선인들로서는 선뜻 거리로 나설 만한 용기를 가질 수 없었다. 조선에는 아직도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이 엄존해 있었고, 그 뒤를 받쳐주는 육군이 35만 명, 해군이 2만5,000명, 도합 37만5,000명의 일본군이 남북 조선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신경이 곤두선 왜놈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두려웠던 것이다. 일왕의 방송이 나온 8월15일이 오히려 평시보다 더 조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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