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⑴ 광복직후의 움직임

  ① 우리 민족은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불완전한 해방을 맞이함

  ② 총독부가 갑작기 무너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사회혼란을 방지하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남

   ⓐ 노동자 : 공장관리운동(일본인들이 시설 파괴와 물자를 빼돌리는 것을 막음)

    ※ 공장관리운동은 반일민족적 성격을 띠고 자치적 성격을 갖음

   ⓑ 농민 :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접수하고 관리하는 활동을 벌임

  ③ 해방 후 우리 민족은 식민지잔재의 여러 폐단 해결과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으로 집중

 ⑵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① 건국준비위원회 결성(1945. 8. 15) :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여운형이 주도

   ⓐ 건국치안대 조직 : 치안의 회복과 질서유지를 위해 지역과 직장별로 조직

   ⓑ 식량대책위원회 - 식량조사와 대책을 세움

   ⓒ 지방의 지부조직 확대 - 각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

   ⓓ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로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통일성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미군이 오기전까지 실절적인 행정담당기관의 역할을 함

  ② 조선인민공화국 선포(1945. 9. 6)

   ⓐ 건준지도부는 연합군의 진주에 앞서 정부를 조직하여 인정받으려고 건준을 해체하고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선포

   ⓑ 정강발표(1945. 9. 14) :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일제잔재 청산, 대중생활의 향상, 세계 평화의 확보 등의 주요내용

   ⓒ 지방의 건준지부는 지방인민위원회로 바뀜


2. 미・소의 한반도 점령과 정치세력의 동향

 ⑴ 미군정의 정책

  ① 미국은 공산주의세력 확대를 막고 자본주의체제를 자국중심으로 재편하는 외교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정책은 남한에도 그대로 적용

   ※ 총독부 건물이 군정청으로 바뀌고 일장기를 내리는 대신 성조기가 게양

  ② 군정실시 선포(1945. 9. 8)

   ⓐ 아놀드 군정장관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미군정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포

   ⓑ 남한의 행정기능을 마련하기 위해 친일관료들을 임용, 친일경찰을 군정경찰로 충원, 친미적이거나 보수적인 인물들을 행정고문이나 군정관리로 채용

   ⓒ 국공유재산과 일본인재산을 접수하고 일본인재산을 군정청소유로 접수시켜 관리

   ⓓ 소작료 : 총수확물의 1/3을 넘을 수 없도록 법령을 정함,

   ⓔ 신한공사 설치 : 이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속된 토지를 관리

   ⓕ 토지분배 방식 : 유상몰수 유상분배방식, 농민과 지주 모두에게 큰 지지를 못 받음

   ⓖ 일본인 재산 불하정책 : 일제시기의 기업가나 귀속기업체의 관리인들에게 넘어감

  ③ 미군정 정책은 우리 민족의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본주의체제의 육성만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으며, 친일파들이 해방 뒤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터전이 마련

 ⑵ 각 정치세력의 활동

  ① 해방직후 주춤했던 우익세력이 미군이 들어오면서 활기

  ② 한국민주당 결성(1945. 9. 16) : 건준 및 좌익세력에 반대하여 ‘임정봉대론’을 내세우며 송진우, 김성수 등이 중심 ⇒ 우익 보수세력 중심

  ③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1945. 10. 16) : 이승만이 자기 중심의 좌우익 정치세력 결성 ⇒ 친일 보수세력들이 따름

  ④ 한국독립당 : 김구 등 임정세력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해방정국을 주도

   ※ 미군정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는 뒤늦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

  ⑤ 국민당 결성 : 안재홍 등 좌우합작운동을 주도, 남한 단정에 반대해 단독선거에 불참 ⇒ 양심적인 우익 민족주의세력을 대변

  ※ 안재홍은 건중의 부회원장까지 지냈으나 인공이 수립되면서 나옴

  ⑥ 조선공산당(1945. 9) : 박헌영의 경성콤그룹과 좌익세력 중심, 완전한 독립과 토지문제 해결 주장,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직

  ⑦ 조선인민당 결성 : 건준위원장이었던 여운형 결성

  ⑧ 남조선신민당 결성(1946. 2) : 경제사학자인 백남운이 북한의 신민당을 모체로 결성

   ※ 여운형과 백남운은 좌익 정치세력 가운데 중도좌파세력

 ⑶ 소련군의 점령정책과 북조선 분국의 결성

  ① 소련은 한반도를 주요 전략지역으로 만들 생각보다는 자신의 우호적인 친소정권을 세우려는 입장

  ② 북한에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뒤 인민위원회로 개편

   ※ 조만식이 평남건준위원장을 맡음

  ③ 소련은 북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 주면서 민족주의세력이 제거되고 좌익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음

   ※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소군정과 대립하면서 민족주의세력은 약화

  ④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군 결성(1945. 10. 10) : 소군정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세력이 차츰 주도권을 잡음, 1946년 북조선노동당으로 개편

 ⑶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와 토지개혁

  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성(1946. 2)

   ⓐ 위원장 : 김일성

   ⓑ 20개조 정강 발표 : 일제잔재의 청산, 중요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의 실시, 8시간노동제 등

  ② 토지개혁 실시

   ⓐ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으로 실행하여 봉건적 지주제도가 청산

   ⓑ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 대중적 권력기반 강화

   ⓒ 토지개혁에 반발한 지주와 농민은 남쪽으로 내려옴

  ③ 북한은 토지개혁, 주요산업 국유화 등을 실시하여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 준비


3.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정치적 분열과 대립

 ⑴ 모스크바 3상회의와 반응

  ① 모스크바 3상회의 ⇒ 해방 이후 최초로 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

   ⓐ 미국, 영국, 소련 등이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를 열고(1945. 12. 16) 전후문제를 논의

   ⓑ 소련과 미국의 주장이 절충되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 만들어짐(1945. 12. 27)

    ※ 결정사항 

      -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 미・소 공위는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와 상담할 것

      - 미・소・영・중이 조선을 5년 동안 공동관리(신탁통치)

  ② 3상회의 결정안의 반응 : 해방이후 좌・우익은 신탁통치 찬・반탁으로 최초로 대립

   ⓐ 우익세력 :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가세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

성하여 반탁운동을 벌임

   ⓑ 좌익세력 :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한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만들어 삼상회의 결정안을 지지

 ⑵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

  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 3. 20)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 개최되었으나 서로 자국의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해관계가 달라 결렬됨

  ②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지만 좌익은 물론 한독당에서도 반대

  ③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 5)도 미국과 소련이 의견대립으로 실패

 ⑶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①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둘러싸고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를 통합하여 남한에서의 안정적인 정치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구상

  ②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지지 속에 여운형,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지만 좌우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모임으로 발전

  ③ 좌우합작운동의 좌우익 대립

   ⓐ 좌익세력 : 민전이 좌우합작 5원칙 발표해서 남한에도 시행할 것을 요구

    ※ 좌우합작 5원칙 :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 아래 토지개혁 실시, 친일파 처단, 정권을 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

   ⓑ 우익세력 : 좌우합작 5원칙에 대응하여 합작 8원칙 제시

    ※ 합작 8원칙 : 친일파는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에 특별법을 만들어 처단, 신탁문제에 유보적인 입장

  ④ 합작원칙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으나 좌우익 정치세력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한 합작원칙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한계에 부딪침

 ⑷ 9월총파업과 10월봉기

  ① 해방 뒤 조선의 경제는 생산의 감소와 대량실업, 물가상승으로 커다란 혼란에 빠짐

  ② 미곡정책에 있어서도 배급제로 바꾸고 미곡공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짐

  ③ 미군정 정책에 대해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늘어나면서 9월총파업과 10월봉기가 일어남

  ④ 9월총파업

   ⓐ 철도노동자들이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는 민군정에 맞서 파업이 시작되어 전 노동자로 파급

   ⓑ 파업 초기에는 임금인상,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실시, 식량배급 등을 요구하였으나 그 뒤에는 좌익정치범을 석방하라는 등 정치적 요구를 내세움

   ⓒ 미군정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진압

   ⓓ 대구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됨

  ⑤ 10월봉기

   ⓐ 대구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 미군정 경찰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가두시위로 이어져 시위는 인근도시와 농촌으로 확대

   ⓑ 쌀 배급량 증대, 경찰의 발포금지와 애국자의 석방 등을 요구

   ⓒ 경북, 경남, 전라, 충청, 제주 등 전국적으로 파급

   ⓓ 미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

  ⑥ 9월총파업과 10월봉기를 겪으면서 좌익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우익세력은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됨


4. 단정수립과 민족의 분단

 ⑴ 단정수립정책과 반대운동

  ① 단정수립정책

   ⓐ 1947년 대소봉쇄를 선언한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방향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꿈

   ⓑ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넘김, 유엔은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결정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북한에 들어갈 수 없자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 :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인정하는 결과

  ② 각 정파의 입장

   ⓐ 한독당(김구), 민족자주연맹(김규식), 남로당, 근로인민당 등 여러 정치세력은 단독선거가 민족 분열을 시킨다고 반대

   ⓑ 한민당(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찬성

   ⓒ 남로당과 전평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자 단선단정 반대, 미소 양국의 군대를 철수 등을 요구하며 ‘2・7투쟁’을 벌임

 ⑵ 제주 4・3봉기와 5・10선거

  ① 제주 4・3봉기

   ⓐ 단선단정 반대투쟁은 제주에서 특히 치열함

   ⓑ 남로당 세력과 민중들은 4월 3일 새벽 경찰서와 서북청년단 공격

   ⓒ 미군 즉시철수, 단독선거 반대, 투옥중인 애국자 석방 등 요구

   ⓓ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유일하게 5・10단독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재선거도 1년이 지난 뒤에 실시

   ⓔ 미군정은 군경과 우익단체를 동원하여 탄압

  ②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하는 남북연석회의에도 참석하고 특히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막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

  ③ 5・10선거 : 이승만과 한민당세력, 중간파에 속하는 인물들만 참여

   ※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선거불참

  ④ 남한은 선거에 따라 제헌국회를 구성하여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과 이시영을 초대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⑤ 북한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1948. 8. 25)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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