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정치'와 민족분열 책동

 ⑴ 문화정치의 본질

  ① 일제는 3・1운동으로 조선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무단통치 대신 문화정치 실시

   ⓐ 헌변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 ⇒ 경찰력은 증강

   ⓑ 조선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 : 「동아일보」「조선일보」등의 신문이 창간(1920)되고 사회단체도 생겼지만 ‘사전검열’과 ‘허가제’를 통해 삭제, 수정됨

   ⓒ 조선의 산업개발과 지방자치를 위해 연구 조사하겠다는 등 민심수습책으로 일부지역에 선거제를 도입하였지만 진정한 지방자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② 문화정치는 조선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중을 더욱 교모히 억압하려는 기만적인 지배정책

 ⑵ 민족분열책동

  ① 일제는 3・1운동을 통해 조선인의 굳센 독립의지와 민족의 단결력에 놀라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의 선전을 강화와 민족분열정책을 더욱 조직적으로 획책

   ⓐ 교육기관과 선전물을 통해 조선인의 열등감을 부추기는 갖가지 묘안을 짜내 선전

   ⓑ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친일세력 육성하고 그들을 이용


2.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⑴ 산미증식계획

  ① 일제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엄청난 전시 초과이윤을 챙겼지만 그 과정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맞게 되었는데 이를 식민지 조선에서 해결할 목적으로 신미증식계획을 세움

   ⓐ 토지를 개량하고 수리시설 확충

   ⓑ 전북 익산 옥구지역 수리조합 저수지 등

  ② 산미증식계획은 농민의 생활향상보다는 지주제만 강화되었고 늘어난 쌀보다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는 쌀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농민은 식량부족을 겪어야 함

 ⑵ 회사령 철폐와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① 회사령 철폐는 일본 자본이 조선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조선 부르주아지의 성장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지만 조선인 자본가들의 일제에의 예속성과 매판성이 심화

 ⑶ 민중의 사회경제적 처지

  ① 노동자들은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고 임금은 같은 조건의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도 안되는 민족적 차별을 받음

  ② 농민들의 생활도 잡세와 수리조합비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작농, 화전민으로 전락


3. 민족주의운동의 분화와 전개

 ⑴ 민족개량주의운동

  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운동

  ② 김성수,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앞장

   ※ 이광수 :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고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이라는 사설을 실어 자치운동의 이론적 배경을 주장

  ③ 실력양성운동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지만 성격상 오래 지속되지 못함

  ④ 민족개량주의운동은 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친일노선으로 변질

 ⑵ 임시정부의 외교독립운동

  ① 3・1운동 전후 나라 안팎에서는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임시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 확산

  ②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로 결정되고 독립전쟁을 주장한 인사들이 대거 이탈과 노령측의 이동휘 등 일부 세력이 상해 의정원에 합류하는 형태로 통합 임시정부 성립

  ③ 임시정부 출범(1919. 9) : 공화주의와 삼권분립의 원칙에 기초한 헌법공포, 임시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임명

  ④ 임시정부는 연통제 실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특히 이승만 정권은 외교 선전활동에 주력하였으나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함

  ⑤ 국민대표대회(1923. 1)에는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고 1930년대 중경으로 이동하기까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정고수파들에 의해 유지

 ⑶ 만주에서의 독립군운동

  ① 만주의 독립군 부대 활동

   ⓐ 북간도 : 북로군정서(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대한정의군정사, 광복단 등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

   ⓑ 서간도 : 서로군정서(이청천), 조맹선, 박장호, 백삼규 등의 의병장들이 조직한 대한독립단 등이 활동

  ② 봉오동전투(1920. 6) :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 격퇴

  ③ 청산리전투(1920. 10)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

  ④ 자유시참변(1921. 6) : 소련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연해주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의 한인부대 사이에서 군사 지휘권으로 참변을 당한 사건

  ⑤ 1920년대 중반 만주의 독립군은 삼부를 통합하고 민족유일당을 건설하려 하였지만 내부 의견차이로 실패하고 남만주에서는 국민부로, 북만주에서는 한족총연합회로 재편

 ⑷ 의열단 활동

  ① 김원봉은 만주 길림에서 윤세주 등 동지 12명과 의열단 결성(1919. 11)

  ② 총독부의 고위관료나 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일제의 수탈과 억압 기관을의 파괴 등 활동 전개

  ③ 신채호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조선혁명선언」: 당시 민족해방운동을 분열, 약화시키던 실력양성론, 외교독립론, 자치론을 비판하고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조선민중이 직접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


4. 사회주의운동의 등장과 민중들의 저항

 ⑴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조선공산당

  ① 1920년대 들어서는 사회주의사상이 민족적・계급적 모순과 민중들의 정치의식 고양으로 급속히 보급됨

  ② 사회주의 단체의 설립 : 서울청년회(1921), 무산자동지회(1922), 신사상연구회(1923), 화요회(1924), 북풍회(1924) 등

  ③ 독서회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서클을 만들어 사회주의사상을 보급

  ④ 조선공산당 창립(1927. 4. 17)

   ⓐ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이끌 지도체로 건설

   ⓑ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내어 정식 지부 승인, 해외로 조직을 확대하여 만주총국, 상해부, 일본부 설치

   ⓒ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시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독자적인 활동기반 마련

   ⓓ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신간회를 조직

   ⓔ 일제의 탄압과 코민테른의 지식인 위주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도록 지시하여 해체

 ⑵ 노동자조직의 결성과 노동운동

  ① 1920년대 들어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

   ※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1924. 4) -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1927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

  ② 부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대규모 연대파업 일으킴(1921. 9)

  ③ 192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파업은 참가인원도 늘고 요구조건도 임금문제뿐 아니라 8시간 노동제, 노동조건의 개선 등을 내걸고 일어남

  ④ 원산 총파업(1929) : 노동운동의 절정기, 3개월여 진행

   ⓐ 발단 -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 사건

   ⓑ 전개 - 이 사건이후 원산지역 총파업으로 발전하였고 장기전을 대비하여 파업자금을 모으고 규찰대를 조직하여 감시

   ⓒ 일제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동연합회를 불법화시키고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

   ⓓ 원산총파업은 노동자 등 민중세력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역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

 ⑶ 농민운동조직의 결성과 활동

  ① 1920년대 전반기 농민운동 : 소작 빈농 중심

   ⓐ 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 소작권 이동 반대, 동척이민 반대 등 생존권 요구 투쟁

   ⓑ 소작농민의 쟁의는 해마다 늘어났는데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등 지주제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지역에서 많이 일어남

    ※ 대표적 농민운동 :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 산미증식계획에 반발한 농민운동도 줄을 이음

  ② 1920년 중반기 농민운동 : 대중적 기반

   ⓐ 농민 일반의 대중조직인 농민조합으로 확대, 개편

   ⓑ 소작쟁의 건수도 증가되고 농업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곳에서도 잇달아 결성

  ③ 1920년대 농민운동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큰 타격을 줌

 ⑷ 신간회운동

  ①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을 합쳐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결성(1927. 2. 15)

  ② 3대 강령을 채택하고 이상재를 회장,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항일단체로 성장

 ※ 3대 강령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 기회주의란? 민족개량주의적 입장에서 친일로 변모한 자치운동단체

  ③ 본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뚜렷한 활동을 벌이지 못하고 반면에는 지방지회는 사회주의 세력의 활약이 컸다.

  ④ 근우회 출범(1927. 5. 27) :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함

  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과 같은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킬 계획이었으나 허헌, 홍명희 등 신간회 간부 및 회원이 검거되면서 무산

  ⑥ 김병로를 중심으로 한 새집행부는 자치론자들과의 제휴로 신간회 해소론의 불씨가 되고 ‘12월테제’와 ‘9월테제’는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가 됨

  ⑦ 1931년 5월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가결되므로 해체

  ⑧ 신간회는 일제에 위협적인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3・1운동 뒤 최대 반일민족통일전선 운동이었다

※ 일제에 대한 중요 민족운동 연대순 : 3・1운동(1919) → 6・10만세운동(1926) → 신간회 결성(1927) → 광주학생운동(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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