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 수탈정책

 ⑴ 전시체제의 강화

  ① 1929년 말부터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으로 미국, 유럽, 일본 등은 큰 어려움에 빠짐

  ② 일본은 경제공황에서 벗어나려고 ‘대동아공영’의 실현이라는 미명아래 침략전쟁을 추진하여 만주, 중국, 미국,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곳곳으로 전쟁 확대

  ③ 일제의 침략전쟁 준비로 식민지조선을 전시체제, 전쟁을 지원하는 병참기지로 변함

   ⓐ 군사력과 경찰력을 강화하여 조선에 대한 탄압을 강화

   ⓑ 조선인의 사상마저 철저히 통제

    ※ 조선사상범예방구금규칙 : 일제가 항일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예방구금제도

    ※ 시국검찰에 관한 건 : 지방법원 검사들에게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철저히 봉쇄하도록 지시한 문서

 ⑵ 황국신민화정책 : 조선민족의 민족성 말살 정책

  ① 전시체제의 하나로 조선인들을 일제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고 군수사업의 노동자나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하려는 데 목적

  ② ‘내선융화’ 강조 : 조선인과 일본인은 형태도 마음도 피도 살도 하나가 되야 한다는 것

  ③ ‘황국신민서사’라는 충성맹세문 암기 강요

  ④ 신사참배 강요 : 천황족속의 귀신을 모시는 신사

  ⑤ 조선어 사용 금지와 「조선일보」「동아일보」등 한글을 사용하는 신문과 잡지 폐간

  ⑥ ‘황국신민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제 실시

  ⑦ 창씨개명 강요 : 조선인 고유의 성씨를 폐기시키고 일본식 성씨를 갖도록 하는 것

 ⑶ 농공병진정책과 식민지공업화

  ① ‘농공병진’을 내세워 식민지공업화 정책 추진 -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만들어 군수산업을 강화, 농산물과 지하자원을 약탈

  ② ‘자력갱생’을 주장하며 농업진흥운동 실시(1933)하여 조선 농촌 구석구석까지 감시와 억압의 손길을 뻗침

  ③ ‘남면북양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지방에는 면화재배를 북부지방에는 가구당 5마리의 양을 기르도록 요구하여 일본인 방직자본가를 보호

  ④ 일본 독점자본은 식량, 의복, 병기, 탄약 등의 군수사업에 집중적으로 진출하여 팽창

 ⑷ 전시수탈과 민중생활

  ① 일제는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

   ⓐ 특별지원병제 실시(1938) - 전쟁인력 보충

   ⓑ 국민징용령 실시(1939) - 노예적 노동 강요

   ⓒ 학도지원병제(1943)와 징병제(1944) 실시 -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과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강제 연행

   ⓓ 근로보국대 또한 정신대를 통한 조선인 납치, 연행

    ※ <규슈탄광의 벽낙서>와 <학살당한 종군위안부> 사진을 보면 징용되어 강제노동하였던 조선인의 실태와 정신대로 끌려간 가운데 일부는 군위안부로서 일본군 성적 노리개로 이용되었다가 죽어간 실태를 잘 보여준다

   ⓔ 침략전쟁의 확대로 지하자원 수탈, 위문금품과 국방헌금을 강요, 식량공급과 공출제 실시로 군량미 확보 등으로 조선 민중들은 살기 어려워지자 이농이 증가


2. 민족개량주의운동의 확산과 친일파의 활동

 ⑴ 민족개량주의운동의 확산

  ① 1930년대 일제는 반일운동의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지방자치제’를 도입 실시

  ② 친일세력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각종 사회단체를 만들고 민족개량주의운동을 대중적 운동으로 확산

 ⑵ 친일파의 활동

  ① 1937년 무렵부터 일부 인사들은 ‘친일’의 모습을 들어내고 황국신민화정책과 전시물자 수탈에 적극적으로 동조

  ② 언론기관인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친일성향의 사설 발표

  ③ 친일기업가는 국방헌금이나 무기를 헌납(김연수, 박흥식 등)

  ④ 대중적 명망이 높던 문인(서정주 등)들은 글과 강연을 통하여 친일활동

  ⑤ 종교단체들도 조직적으로 나섬

  ⑥ 교육계에도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며 협력을 권유(송금선, 김활란 등)

  ⑦ 그밖에도 사법, 군대, 경찰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친일파가 활동


3. 나라 안의 민족해방운동

 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① 일제의 전시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일부는 공장, 광산, 농촌으로 들어가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활발히 조직

  ② 혁명적 노동조합운동(비합법적인 비밀결사)

   ⓐ 대규모 중화학공장이 들어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주로 발생

   ⓑ 튼튼한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만드는데 역점을 둠

    ※ 태평양 노동조합사건, 적색노동조합활동, 적색노조 원산좌익위원회 결성 등

  ③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 청년동맹, 여성동맹, 소년동맹 등을 편입하여 결성

   ⓑ 야학과 독서회, 강연회 등을 통해서 농민들의 민족의식과 계급의식 일깨움

   ⓒ 전국각지에서 할발히 벌어짐(함경북도 명천의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이 대표)

  ④ 1930년대 말에 일제의 탄압으로 사라져 갔지만 해방직후 건국운동의 밑거름이 됨

 ⑵ 국학운동과 건국동맹

  ① 국학운동

   ⓐ 안재홍, 정인보 등과 함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편찬사업을 펼치며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응

   ⓑ 한글학자들은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우리말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보급

    ※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1942)을 일으켜 탄압하자 이윤재는 감옥, 박두진은 붓을 꺾고 침묵으로 저항

  ② 건국동맹

   ⓐ 여운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조직체로서 해방을 준비

   ⓑ 일제의 패망이 빨리 옴으로서 건국동맹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해방직후 들어선 건국준비위원회의 대중적 토대가 됨


4. 항일무장투쟁

 ⑴ 재만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

  ① 1937~1945년에는 중국과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활발

  ② 조선혁명군(양세봉) : 중국의용군과 힘을 합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③ 한국독립군(이청천) : 동만주 지역에서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전투, 대전자령전투에서 큰 승리

  ④ 간도의 조선 농민과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하여 ‘추수폭등’ ‘춘황투쟁’을 벌임

  ⑤ 항일유격대는 만주 지역의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일하고 8곳에 해방구를 세우고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 실시

   ※ 동북인민혁명군 :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

  ⑥ 조선인 항일유격대 : 보천보전투 승리가 대표적인 것

   ※ 조국광복회 조직 :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국경지대로 옮겨와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하고 독립적인 인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조직

   ※ 혜산진사건 : 유격대토벌에 힘을 기울여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원 수백명 검거 사건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①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인들 사이에는 중국 관내의 모든 항일세력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

  ②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 결성(1932) : 의열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의 연합 ⇒ 민족혁명당 결성

  ③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1937) :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자동맹과 연합 ⇒ 조선의용대 창설

   ※ 조선의용대 - 중국 화북지방에서 여러 차례 항일전을 치룸

  ④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 : 최창익, 허정숙, 무정 등과 조선의용대가 결성

  ⑤ 화북조선독립동맹 : 김두봉 등 민족주의자와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연합

   ※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 변경하고 일제가 망한 뒤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으로 편입

 ⑶ 중경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① 임시정부는 1932년 운봉길의사의 상해 의거로 새로운 활기를 찾기 시작

  ② 김구, 조소양 등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국민당 조직(1935. 11)

  ③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일부세력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1937. 8)

   ※ 중국 관내 항일단체는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혁명당 중심)과 한국광북운동단체연합회(한국국민당 중심)으로 양분

  ④ 임시정부는 중경에 자리를 잡고(1940),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합당(1940)하여 임시정부(김구가 주석) 강화

   ※ 한국독립당 :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강령’ 발표(1941. 11)

  ⑤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임시정부에 합류로 중국 관내 독립단체의 통일

  ⑥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1940. 9)

   ⓐ 화북 지방으로 가지 않은 조선의용대 참여와 국민당의 군사원조로 군대 모습 갖춤

   ⓑ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정부와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 때문에 독자적 군사 행동권을 갖지 못함

   ⓒ 일본에게 선전포고(1941. 12)를 하고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전선에 8명의 공작대를 파견하고 미국과 합동작전도 꾀함

  ⑦ 일제가 패망하면서 임시정부와 한국광복운은 미・소 당사국 두 나라로부터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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