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경래의 난

 ⑴ 1811년 12월~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봉기

 ⑵ ‘평안도 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⑶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과 함께 19세기에 일어난 대표적 농민항쟁


2. 사회적 배경

 ⑴ 농업기술 발전

  ① 농민 1인당 경작능력이 4~5배나 늘어나 불필요해진 많은 무전농민(無田農民)은 유민화(流民化)

  ② 유민

   ⓐ 도시나 광산 등지로 가서 상업에 종사

   ⓑ 광산노동자

   ⓒ 고용노동자

  ③ 경영형 부농(經營形富農) 발생 : 고용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지경영을 직접 관리, 감독하여 부를 축적

 ⑵ 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

  ① 사상(私商)층이 광범위하게 형성 : 만상(灣商), 송상(松商) 등

  ② 특권상인층의 존재로 인해 상업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불만이 많음

 ⑶ 상업이나 농업을 통해 부를 획득한 계층

  ① 경제력을 행사 : 농촌사회의 말단행정력을 장악

  ② 중앙정치권까지 진출하려고 시도

 ⑷ 관료가 되지 못한 몰락양반층의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조

 ⑸ 신분제가 점차 붕괴되어 하층민 사이에 평등의식 성장

 ⑹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보급

 ⑺ 세도 정권의 폐단

  ① 정치기강 문란

  ② 인사행정 문란

  ③ 지배계층의 농민층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강화


3. 난의 발생과 경과

 ⑴ 몰락양반인 홍경래

  ① 토호(土豪)인 우군칙(禹君則), 김창시(金昌始)와 대규모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箸) 등을 농민군 최고지휘부로 삼고, 가산군(嘉山郡) 다복동(多福洞)에 근거를 두면서 농민전쟁을 준비

  ② 평안도민의 정치참여배제 등 지역차별정책에 불만이 많은 몰락 양반, 상인, 토호, 이속(吏屬) 등을 농민군의 지도부로 포섭

  ③ 평안도의 주요도시에 지방조직 결성

  ④ 운산(雲山) 촉대봉(燭臺峰)의 광산노동자와 빈민, 유민 등을 고용 : 하층 군사로 삼아 훈련

  ⑤ 중앙정치권에 진출하고자 하는 부유층도 참가

  ⑥ 한성(漢城)의 중인, 서얼층 및 압록강 너머 망반인(亡叛人) 등과도 연계를 맺고 거사를 모의하는 등 모든 반정부세력을 규합

 ⑵ 12월 18일, 거병(擧兵)

  ① 원래 거사일을 12월 20일 : 거사계획이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에게 발각

  ② 거병 당시 다복동에 모인 병력은 1000명

  ③ 거병 10일도 채 되지 않아 청천강 이북지역 거의 장악 : 가산,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

  ④ 12월 20일, 박천 점령한 후 영변과 안주의 공략순서를 놓고 대립하다가 홍경래가 부상 : 홍경래의 요양과 전열수습을 위해 다복동으로 회군, 4일간 진공을 늦춤

  ⑤ 관군 : 영변에서 반란군의 내응세력을 체포

  ⑥ 영변공략이 어려워짐에 따라 안주를 공격하나 실패

  ⑦ 12월 29일,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정주성으로 후퇴

  ⑧ 1812년 1월 10일, 곽산 사송야전투에서 관군에서 크게 패배 → 계속 패배

  ⑨ 1월 17일경 : 정주성을 제외한 반란군의 거점은 한 곳도 남지 않음

  ⑩ 4월 19일, 정주성 함락 : 5개월에 걸친 난은 진압


4. 난의 성격과 실패 원인

 ⑴ 1811년 12월 22일, 반란군 격문(檄文)

  ① 지방적 차별대우를 반대하는 평안도 몰락양반, 토호들의 요구를 반영

  ② 안동 김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민(民)의 생활에 끼친 폐단을 비판

  ③ 조선왕조 멸망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제시

  ④ 농민의 절실한 문제인 토지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⑤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사상도 철저하지 못했다.

 ⑵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적극 유도하거나 농민전쟁에 가담한 농민층의 투쟁열기를 북돋아주지 못했다 : 반란군이 쉽게 무너진 가장 큰 이유

 ⑶ 토호와 상인

  ① 반란군을 지원하기로 약속

  ②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곧 배반

 ⑷ 전략상의 오류 : 속전속결을 못하고 중간에 4일이나 지체, 관군이 전열을 정비

 ⑸ 세도정권의 부패와 무능성 폭로

 ⑹ 일반민들에게 조세거부나 무력항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여 조선 사회의 해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

 ⑺ 평가

  ① 1950년 이전

   ⓐ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

  ⓑ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 혹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

  ② 1960년 이후 :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고용 노동자와 빈농(貧農)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反封建農民戰爭)으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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