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종의 4번에 걸친 선위(禪位) 파동
⑴ 1406년(양녕 13세)
① 표면상의 이유 : 건강상의 문제
②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탄핵 사건이 일어나 ‘민무구의 옥’이 발생하면서 선위문제는 없던 걸로
⑵ 이후 3번의 선위 파동
① 건강에 대한 불안감과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계획
②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나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좌하면서 왕이 정사(政事)를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군정 안정에 주력하겠다’
③ 갑작스런 병사(病死)에 대비 : 왕권을 둘러싼 싸움을 방지
④ 양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
⑶ 1418년 폐세자 사건(4번째 선위 파동) → 충녕(후에 세종)이 왕세자에 책봉
① 황희 등 대신들 중 일부 : 반대하다가 유배
② ‘자신이 이룬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
⑷ 양녕의 행동
①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향유
② 엄격한 궁중 생활에 부적응
③ 야사(野史) 기록
ⓐ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해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
ⓑ 태종과 어머니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
2.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기틀이 확립한 시기
⑴ 세종 집권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 있어서 정치는 아직 태종 영향 아래에 있었다.
⑵ 1423년(태종이 죽은 다음해)부터 정치력 발휘 : 왕도 정치 실현 시작
① 개국 공신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②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가 많았다.
⑶ 1437년이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 측면에서 분수령
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② 세자가 서무를 재결
③ 언관과 언론에 대해 부드러운 왕의 태도 : 탄압이나 징계가 거의 없었다.
⑷ 유교 정치의 진전
①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에 의해 유교적 제도의 정리가 가능
②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유교 정치의 기반이 안정
③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
ⓐ 세종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
ⓑ 소갈증(당뇨병)으로 정무(政務)가 과도한 육조직계제가 부담
ⓒ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 정치 구현
⑸ 집현전
① 학문적 사업
ⓐ 책편찬
ⓑ 훈민정음체제 완성 : 한글
② 인재 양성
③ 새로운 문화 정착
⑹ 서운관
① 혼천의 : 천체 관측 기계
② 앙부일구 : 해시계
③ 자격루와 옥루 : 물시계
④ 측우기 :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
⑺ 국토 개척과 확장
① 김종서의 6진 개척 : 두만강 방면
② 최윤덕의 4군 설치 : 압록강 방면
③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⑻ 그 외
① 박연 : 아악(雅樂) 정리
②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 주조
③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佛書) 번역
④ 단군 사당 신축
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제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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