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93년, 거란의 고려 침입
⑴ 거란
①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
②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대군으로 고려 침략
⑵ 고려
① 여진을 통해 거란의 침공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대책을 세우지 않음
② 10월, 전국에 영을 내려 병사 동원
2. 내사시랑 서희의 외교 담판
⑴ 중군사
⑵ 상군사인 시중 박양유(朴良柔)과 하군사인 문하시랑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지금의 평북 지방)에서 적을 방어
⑶ 거란 : 80만 대군으로 봉산군(蓬山郡)을 빼앗은 뒤 항복하라는 위협
⑷ 고려
① ‘항복하자’는 의견
② 할지론(割地論)
ⓐ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
ⓑ 우세
⑸ 서희
① 거란의 출병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음을 간파
② 거란과 담판지을 것을 강력히 주장
ⓐ 민관어사 이지백(李知白)이 지지
ⓑ 성종(成宗, 981~997 재위)의 찬성
③ 소손녕 :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에게 패하게 되자 고려와의 담판에 응함
⑹ 소손녕이 말하는 침입 이유
①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거란이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있다.
②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
⑺ 서희의 답변 :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고려와 거란의 교빙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의 평정이라는 선결조건을 공동으로 해결하자고 제안
①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
② 요나라의 동경(東京:지금의 랴오양(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境內)
③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 :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
④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조빙이 가능
→ 거란 : 서희의 대답을 인정하고 군사를 돌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데 동의하는 서신을 보냄
3. 결과
⑴ 서희는 평장사에 올라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
⑵ 흥화진(興化鎭:義州), 용주(龍州:龍川), 통주(通州:宣川), 철주(鐵州:鐵山), 구주(龜州:龜城, 『遼史』에서는 貴州), 곽주(郭州:郭山) 등의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다시 우리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크게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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