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석정에 대한 삼국유사기록

 ⑴ 49대 헌강왕(憲康王 : 876~886 재위) :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다. 왕이 또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와 춤을 추었다. 좌우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왕만은 홀로 이것을 보았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으니 왕 자신이 춤을 추어 그 형상을 보이었다. 신의 이름을 상심(祥審)이라 한다. 옛부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일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전한다. 어떤이는 신이 이미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본떠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모습을 새겨 후세 사람에게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한다. 이는 그 형상에 따라 일컬은 것이다.

 ⑵ 55대 경애왕(景哀王 : 924~927 재위)

천성 2년(927) 정해 9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은 그 해 겨울 11월 불시에 서울로 쳐들어 왔다. 이 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병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닥치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종이 되기를 빌었지만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궁중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해 죽게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였다. 이듬해(928) 무자 봄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도착하니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2. 포석정 :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장소 - 헌강왕때 기록


3. 포석정과 경애왕

 ⑴ 포석정에 간 것은 음력 927년 11월(양력 927년 12월)로 추운 날씨 :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는 술잔치를 벌였을까?

 ⑵ 경애왕 : 9월에 견훤이 영천까지 침입했다는 것을 알았고, 왕건에게 구원 요청한 상태⑶ 경애왕이 죽은 뒤 신라 반응

  ① 시신을 서당에 모시고 경순왕과 신하들이 통곡

  ② 경애왕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였다면 과연 신하들이 후히 장사를 지내줄 수 있었을까?

 ⑶ 포석정 행사가 나라를 위한 국가적인 의식을 행했을 가능성이 많다.

 ⑷ 왜곡된 이유

  ① 고려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판단

  ②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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