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창근(王昌瑾)의 거울과 왕건(王建)의 반정(反正)

 ⑴ 왕창근(상인)이 노인<‘노인은 토성신의 환신’이라고 왕창근이 말함>에게서 받은 묘한 내용의 글이 있는 거울을 들고 궁예를 찾아왔다.

 ⑵ 석학들의 해석

  ①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해석)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②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냈다” (해석) 청목은 곧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

  ③ “축(丑)이 멸하고 유(酉)가 일어난다” (해석)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

  ④ 사실대로 말하면 왕건에게 피해가 갈까봐 적당한 선에서 꾸며서 보고

 ⑶ 의심이 많은 궁예

  ① 왕건에게 모반을 계획했는지를 물어봄

  ② 장주의 충고 : “복종하지 않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 - 역모 인정

  ③ 궁예 : 왕건을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금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왕건에게 하사

   ⓐ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

   ⓑ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

 ⑷ 왕건

  ① 이 사건을 계기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반정 결심

  ②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고자 하나 망설임 : 부인 유씨 설득으로 결심

  ③ 왕성 공격 : 궁예 축출

  ④ 918년 6월, 국호를 고구려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


2. 왕건 반정에 반발한 인물

 ⑴ 환선길

  ① 마군장 복지겸에게 발각, 왕건에게 보고 : 왕건은 증거가 없다고 무마

  ② 50여명이 내전에 침입 : 왕건이 침착하자 복병이 있다고 판단, 도망

  ③ 근위병이 추격하여 사살, 동생 환향식도 처형

 ⑵ 청주 세력

  ① 임춘길,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

  ② 복지겸에게 발각, 실패

 ⑶ 이흔암

  ① 웅주(공주) 성주였던 그는 궁예 축출후 철원으로 상경 : 왕건을 인정하고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

  ② 부인 환씨의 말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 : 이흔암 처형

  ③ 이흔암 역모사건은 조작된 것


3. 고려와 (후)백제의 나라 운명을 건 승부

 ⑴ 대야성 전투(927년 7월) :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견훤의 20년 공든 탑

  ① 925년 10월 화친조약 : 견훤의 사위 진호와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신을 서로 인질로

  ② 진호 병사(病死) : 견훤의 오해, 왕신 사살

  ③ 견훤이 20년만에 점령(920년 10월)한 대야성을 왕건이 함락

 ⑵ 공산대첩(927년 9월) : 피눈물을 흘리며 달아난 왕건

  ① 신라 경애왕 : 927년 9월,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사망

  ② 김부 → 경순왕

  ③ 견훤이 공산 길을 택해 돌아갈 것을 예상 : 병력을 기병중심으로 구성, 추적

  ④ 왕건의 사면초가

   ⓐ 신숭겸의 희생으로 왕건은 목숨을 건짐

   ⓑ 신숭겸의 죽음을 두고 “내가 좌우 손을 잃어버렸다”고 한탄

  ⑤ 계속되는 고려의 수세

 ⑶ 병산싸움(930년 1월) :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선 견훤

  ①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지금의 안동)을 포위

  ② 신라 장군 선필의 귀순 : 그 지역의 지리에 밝고 백성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③ 유금필을 선두로 고창 진입, 승리

  ④ 강릉에서 신라의 100여성 투항

 ⑷ 임진해전(932년 9월) : 백제 수군, 개성을 안방처럼 드나들다

  ① 상귀의 수군

   ⓐ 왕궁 침탈

   ⓑ 저산도 점령 : 고려군 군마를 양성하던 곳

  ② 상애의 수군

   ⓐ 개성 앞바다를 거쳐 고려 최북단 대우도(평북 용천) 공격

   ⓑ 유금필의 반격으로 퇴각

 ⑸ 운주전투(934년 9월) : 견훤, 양팔을 잃다

  ① 운주(지금의 충남 홍성) : 궁예때는 태봉의 땅이었으나 왕건 반정후 백제로 투항한 땅

  ② 왕건의 운주 정벌 : 당진, 아산이 크게 위험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

  ③ 견훤의 화친 제의 : 왕건은 흔들리나 유금필의 주장으로 결전, 승리

  ④ 나주 탈환 계획 수립, 성공

   ⓐ 운주가 고려 수군의 거점이었음을 반증하는 일

   ⓑ 왕건이 운주 공략에 집착한 이유는 나주 탈환


4. 신검의 왕위 찬탈과 (후)백제 몰락

 ⑴ 신검(적자) :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

  ① 신하 : ‘신검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

  ② 견훤 : 금강(서자)을 왕위 계승권자(태자)로 지명

  ③ 935년 3월, 능환<신검의 외가, 그것도 견훤 첫째부인과 형제관계에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을 중심으로 반란

   ⓐ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

   ⓑ 도읍인 완산의 호족이 난을 일으켜 신검을 왕위에 세운 것

 ⑵ 견훤

  ① 935년 6월, 나주로 탈출, 고려에 귀순

  ② 왕건 : 견훤을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

  ③ 신라 경순왕 : 대세가 왕건에게 있다고 판단, 고려에 투항하려는 뜻을 내비침

 ⑶ 935년 10월, 신검 왕위에 오름

  ① 반란 즉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뜻

  ② 저항 세력을 무마하거나 척살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뜻

 ⑷ 경순왕, 박영규(견훤의 사위, 신검의 매형)

  ① 고려에 귀순

  ② 왕건 : 통일을 확신

 ⑸ 936년 9월 출병

  ① 견훤도 합류

  ② 일선(지금의 경북 선산)에서 첫 전투, 승리

  ③ 신검 : 완산주에서 반격을 준비했으나 결국 항복

      → 후삼국시대 종식, 고려의 시대 도래


5. 태조(太祖, 918~943 재위)의 정책

 ⑴ 당면 과제 : 정치 안정과 민심 수습

 ⑵ 온건한 방법으로 정치 안정 시도

  ① 기존 체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마련

  ② 행정 관서에 대한 인사이동과 궁예 때의 탐관오리에 대한 숙청만 단행

  ③ 지방 각처에서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기반을 가지고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던 호족을 극진히 회유, 포섭

  ④ 즉위 직후 호족에게 사절 파견 : 저자세 외교로 화친 시도

  ⑤ 귀부해오는 호족을 특별히 대우

  ⑥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및 호족출신 관료의 딸과 혼인

  ⑦ 유력자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

  ⑧ 기인제도(其人制度),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 등 여러 정책 시행

  ⑨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위해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의 경영에 힘씀

 ⑶ 민심 수습책

  ① 궁예 때의 가혹한 수취를 비판하면서 '취민유도'(取民有度)를 표방

  ② 평민으로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된 자 1000여 명을 찾아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변상

  ③ 3년 동안 백성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

  ④ 유민(流民)은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⑷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

  ① 북방 개척

  ② 서북 : 청천강 하류 안주(安州)지방

  ③ 동북: 영흥(永興)지방

  ④ 발해(거란에 의해 멸망)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과는 국교 단절

 ⑸ 943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 10조’(訓要十條) 남김

  ① 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하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를 보내어 각각 다스리도록 하되, 간신들이 승려들의 청탁을 들어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한다.

  ② 사원을 함부로 세우면 나라의 운수(運數)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도선(道詵)이 말했으니, 도선이 산수(山水)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사원 외에는 마음대로 사원을 창건하지 못하도록 한다.

  ③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올바른 법도이지만, 만약 맏아들이 어리석으면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 또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를 왕이 되게 한다.

  ④ 우리 나라는 사람도 땅도 중국과 다르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 거란은 야만의 나라이고 풍속과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衣冠) 제도(制度)를 함부로 본받지 않는다.

  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되니, 철마다 서경에 가서 머무르기를 모두 100일 넘도록 하여 그곳의 안녕을 이루도록 한다.

  ⑥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후세에 간신이 이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한다.

  ⑦ 신하의 곧은 말은 따르고 헐뜯는 말은 멀리한다. 백성을 부리되 농사철을 피하고, 요역을 가볍게 매기며,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어진 정치를 하되 상벌(賞罰)을 도리에 맞게 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로울 것이다.

  ⑧ 차현(車峴 : 車嶺)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밖은 산지(山地)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 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 차령 이남 전체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차령을 북쪽 경계선으로 하고 금강을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홍성, 공주, 청주 일대를 지칭하는 것

 ※ 친(親)궁예적인 지역으로 모반사건이 일어나면서 왕건의 정치 기반을 위협했기 때문

  ⑨ 나라의 관직을 함부로 늘이거나 줄이지 말며, 만약 공(功)이 없는 자, 사사로이 친한자나 친척 등에게 관직을 주어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사나운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항상 조심하고, 병졸들을 잘 돌보아 그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는 관직을 더해 준다.

  ⑩ 옛 고전을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는다.

 ⑹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 : 불교, 지리도참설, 유학


6. 광종(光宗, 949~975 재위)의 정책 : 고려 초기 왕권강화에 큰 성과를 거둔 왕

 ⑴ 제 1 시기 (광종 즉위~7)

  ① 선왕(정종)의 서경 천도 계획 포기

  ② 개경안에서 정치의 안정을 위해 노력

  ③ 949년 8월 : 공역자(功役者)를 4등급으로 나누고 쌀을 차등있게 하사하여 국초 이래의 호족을 우대 정책

  ④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외적으로 자주와 위엄을 과시

  ⑤ 각 주·현의 공부(貢賦)를 제정 : 경제제도의 정비를 단행

  ⑥ 중국 왕조와 활발한 외교 교섭 : 왕조로서의 정치적 기반을 닦음

  ⑦ 유교정치 수행

  ⑧ 불교에도 깊은 관심

 ⑵ 제 2 시기(광종 7~11)

  ①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고 호족과 국초 공신세력의 특권을 억제하는 정책 수행

  ②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 호족, 공신 : 많은 노비를 소유하여 그들의 군사적·경제적 배경을 형성

   ⓑ 노비를 안검(按檢)하여 양민으로 만들어 그들의 세력기반에 큰 타격을 주어 당시 호족, 공신 세력의 큰 불만을 야기

  ③ 958년,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로 과거제 실시

   ⓐ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관리 선발제도는 아니다.

   ⓑ 사장(詞章) 중심의 제술업을 처음 시행

   ⓒ 신라 독서삼품과(국학 출신자만 응시 가능)와 달리 응시자격을 전국의 군현에 개방

   ⓓ 종래의 관리 등용방식을 당장 전면적으로 바꾸거나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 국초 이래 커다란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무훈 공신들을 정치적으로 약화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유교사상을 가진 신진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수행해나가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④ 960년, 백관의 공복제도(公服制度) 시행

  ⑤ 군제를 크게 개편, 병권(兵權)을 집중

   ⓐ 순군부(徇軍部, 호족의 아성) → 군부(軍部)

   ⓑ 건국 이래 최고의 관부였던 광평성(廣評省)의 지위를 내렸다.

   ⓒ 시위군인 내군(內軍) → 장위부(掌衛部), 숫자를 증가

   ⓓ 물장성(物藏省) → 보천(寶泉), 군수(軍需) 확보

 ⑶ 제 3 시기(광종 11~26)

  ① 왕권강화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세력을 제거

  ② 계기 :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 - 귀양 조치

  ③ 국초의 대표적 공신인 박수경(朴守卿), 최지몽(崔知夢) 등을 거세

  ④ 혜종과 정종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등의 대숙청 단행

  ⑤ 국방 정책

   ⓐ 동북계(東北界) : 장평(長平), 박평(博平), 고주(高州), 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많은 성을 구축

   ⓑ 서북계 : 장청(長靑), 위화(威化), 무주(撫州), 안삭(安朔) 등 지금의 평안남북도 지방에 많은 성을 구축

 ⑷ 개혁 정치의 의의

  ① 새 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신감과 위엄을 과시

  ②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

  ③ 한계점

   ⓐ 개혁 범위가 주로 정치에 한정되어 중앙의 정계 개편에 치중

   ⓑ 지방제도 개편이나 광범한 경제 사회적 제도의 개편은 상대적으로 미약

   ⓒ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을 야기


7. 무인정권(武人政權) : 무인들이 집권하여 이끌었던 정치 체제

 ⑴ 1170년(의종 24)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1270년(원종 11)까지 약 100여 년 간 지속

 ⑵ 정치체제가 외형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실제로는 주목할 만한 현상 발생

  ① 국가의 공병(公兵) 조직이 제 기능을 거의 상실 : 도방(都房), 서방(書房)과 같은 기구(사병(私兵) 조직, 가신(家臣) 집단)가 당시 권력자를 중심으로 조직화 - 무인정권을 지탱해주는 물리적 인적 기반

  ② 재추(宰樞) 체제가 유명무실 : 중방(重房), 교정도감(敎定都監) 등과 같은 무인의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통하여 국가의 주요한 정책 결정이 성사

  ③ 무인 집권자 : 1명의 국왕(의종)을 살해, 2명의 국왕(명종, 희종)을 폐위

  ④ 전시과 체제 붕괴 : 고려 초기 이래 관료들의 물적 기반

  ⑤ 토지탈점과 겸병이 횡행(橫行)

 ⑶ 무인정권의 시기구분

  ① 1기

   ⓐ 이고(1170~1171), 이의방(1171~1174), 정중부(1174~1179), 경대승(1179~1183), 이의민(1183~1196)이 집권했던 약 30여년

   ⓑ 무인집권자들의 권력투쟁, 집권자의 잦은 교체, 문신들의 반(反)무인란 등으로 정권자체가 불안정

   ⓒ 중방 : 이전에 무반의 합의기구였고 이 시기 정치운영의 중심기구

   ⓓ 문무교차제(文武交差制)에 입각한 외관 파견, 감무(監務)의 대량 파견 등의 시책 : 무반 출신이 정계에 대량 진출

   ⓔ 조위총(趙位寵)의 봉기, 망이망소이(亡伊亡所伊)의 난

  ② 2기

   ⓐ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 정권을 잡은 이후 최이, 최항(1249~1257), 최의(1257~1258)의 최씨 가문 4대가 집권했던 약 60여년

   ⓑ 무인정권 100년 중 가장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전형적인 무인정권기

   ⓒ 교정도감이라는 권력기구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권력을 유지 : 무인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인집권자들의 중심적인 권력기구

   ⓓ 도방을 통해 사병 조직 : 신변보호, 권력 유지

   ⓔ 정방 : 관리의 인사를 전단(專斷)

   ⓕ 원나라와의 40여 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 수행 : 1231년, 강화도 천도

    - 목적 : 원과의 장기적인 전쟁수행, 정권 유지

    - 최씨정권에 대한 민의 이탈을 가속

    - 원과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한 요인

    - 최씨 정권의 몰락과 무인정권의 종식을 가져오게 한 원인 

  ③ 3기

   ⓐ 1258년, 김준이 최의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임연(1268~1270), 임유무(1270) 부자에 이르는 약 10여년

  ⓑ 권력기구 : 교정도감

  ⓒ 1258년, 원과의 전쟁 종식, 양국간의 강화 과정에서 국왕 중심으로 한 문신세력에 의해 1270년, 무인정권 몰락

 ⑷ 무인란 발생 원인

  ① 무신에 대한 문신의 차별

  ② 문반과 무반의 대립과 갈등

  ③ 군반제(軍班制)라는 군제의 모순이 무인의 지위 저하 초래

 ⑸ 무인정권의 역사적 평가

  ① 평가는 현재 다양한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② 무인정권의 성립이 고려사회 변동의 주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 무인정권 이후 고려사회는 혼란과 모순이 축적

   ⓑ 제도적으로 점차 붕괴되기 시작

   ⓒ 조선 왕조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자의적인 것

  ③ 중세 봉건제 사회가 성립되는 계기

   ⓐ 국가의 공병조직이었던 부병제의 붕괴

   ⓑ 사병과 같은 지방무사집단의 등장

   ⓒ 농장과 같은 장원 발생

   ⓓ 노예 신분의 동요와 같은 여러 현상

  ④ 무인정권의 성립은 정치지배세력의 단순한 교체에 불과 : 무인란 이전의 사회모순이 무인정권 성립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8. 대몽항쟁(對蒙抗爭)

 ⑴ 몽골 침입이전 상황

  ① 고려 : 1219년, 몽골의 정복전쟁을 피해 고려 영토인 강동성에 들어온 금나라 유민인 거란족을 몽골군과 협공하여 함락

  ② 몽골 :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요구

  ③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던 길에 국경지대에서 피살 : 몽골 침략 → 1231년~1257년, 7차례 몽골 침략

 ⑵ 1차 침입(1231)

  ① 몽골 : 저고여 피살사건의 책임을 추궁

  ② 고려 : 금나라의 소행이라 주장, 예물을 주어 화의를 성립

 ⑶ 2차 침입(1232)

  ① 몽고

   ⓐ 도단(都旦)을 다루가치로 삼아 개경에 파견 : 오만한 행동

   ⓑ 몽고의 과중한 공물 요구

  ② 최우(崔瑀)의 강화도 천도 : 몽고에 대한 항전태세를 분명히

  ③ 내시 윤복창(尹復昌), 서경순무사 민희(閔曦) : 다루가치 습격

  ④ 2차 침입 : 고려 승리

 ⑷ 3차 침입(1235)

  ① 몽고 : 전국토를 유린

  ② 불력(佛力)으로 몽고군을 격퇴하려고 『대장경』(大藏經) 조판 시작

  ③ 고려 : 1238년,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청

  ④ 몽고 :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1239년에 모두 철수

  ⑤ 고려 : 고종이 모후 유씨(柳氏)의 상중임을 들어 왕족 신안공전(新安公佺)을 왕의 동생이라 칭하고 대신 입조

 ⑸ 4차 침입(1247) :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않아 큰 피해는 없었다.

 ⑹ 5차 침입(1253)

  ① 계속되는 몽고의 출륙환도(出陸還都)를 고려가 거절

  ② 고려 : 치열한 항쟁

  ③ 몽고 : 전국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 고려의 피해는 날로 확대

 ⑺ 6차 침입(1254)

  ① 몽고 : 개경 환도를 요구하면서 침입, 전국토를 유린

  ② 고려

   ⓐ 경상도와 전라도의 별초군(別抄軍)을 뽑아올려 강화도 수비를 강화

   ⓑ 각 지방에서는 별초군과 백성들이 끈질기게 항전 : 몽고군에게 큰 타격 - 철수

  ③ 1256년, 다시 공격 : 강화도의 고려정부 위협 - 철수

 ⑻ 7차 침입(1257)

  ① 고려

   ⓐ 국왕 친조와 출륙환도를 지연

   ⓑ 1257년, 공물 중단

  ② 몽고

   ⓐ 6월, 고려 침공

   ⓑ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등지를 약탈

   ⓒ 국왕 친조를 태자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 : 고려측에서도 이 조건을 받아들여서 곧 강화가 성립되는 듯

   ⓓ 태자 입조를 시행하지 않고 안경공 창을 파견 : 몽고군 침입

  ③ 1258년, 최의가 살해 : 항전을 고집해 왔던 최씨 정권 붕괴

  ④ 대몽강화론(對蒙講和論) 대두

   ⓐ 최자(崔滋), 김보정 등이 제기

   ⓑ 몽고와의 화의교섭이 급속히 진전

  ⑤ 합의된 화의 조건

   ⓐ 태자 입조

   ⓑ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을 것

   ⓒ 몽고 사신의 빈번한 왕래를 자제할 것

   ⓓ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말 것

   ⓔ 몽고군의 완전 철수

   ⓕ 다루가치를 두지 말 것

 ⑼ 영향

  ① 원의 부마국(鮒馬國)으로 전락

   ⓐ 관제, 의전 등이 모두 격하

   ⓑ 만호부(萬戶府), 홀치(忽赤) 등 몽고식 관제 도입

  ②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동북면), 동녕부(東寧府, 서북면),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제주도)를 설치

  ③ 고려 풍속 변화 : 몽고식 의복과 변발이 유행

  ④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거의 황폐 

  ⑤ 문화 손실 : 대구 부인사, 황룡사의 9층 목탑 등


8. 공민왕의 개혁정책과 반원정책(反元政策)

 ⑴ 개혁정책

  ① 1351년 11월, 이제현,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

  ② 1352년 1월, 몽고식의 변발(髮)과 호복(胡服) 폐지 :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 방향을 암시

  ③ 1353년 2월, 정방(政房) 혁파 : 정치기강 확립

  ④ 1353년 8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설치 :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 시정

  ⑤ 부원배(附元輩)를 중심으로 하는 권문세족의 반발 : 조일신의 난이 발생하여 공민왕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부원세력이 강화되어 더 이상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⑥ 1356년, 본격적인 개혁정치 단행

   ⓐ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전격적으로 주살

   ⓑ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

   ⓒ 압록강 이서와 쌍성(雙城)지역 공격

   ⓓ 원의 연호를 정지

   ⓔ 원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官制)도 문종 때의 것으로 환원

   ⓕ 24항목의 개혁안 발표

   ⓖ 외척세력(홍언박 등)이 중심 : 한계 존재

   ⓗ 홍건적의 침입

   ⓘ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전반적인 면에서 실패

  ⑦ 내재추제(內宰樞制) 신설

   ⓐ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都堂)의 권리를 약화

   ⓑ 왕권 강화

   ⓒ 외방의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 강화

  ⑧ 권문세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공민왕과 신돈은 신진 사대부 세력과 정치적 제휴

  ⑨ 1371년, 신돈 제거 : 개혁정치 중단

 ⑵ 반원정책(反元政策)

  ① 왕자로서 원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원의 쇠약상을 목격, 즉위후 곧 반원 의지 표시

  ②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 약화 : 1354년, 조정군(助征軍) 파견

  ③ 1356년 5월, 적극적인 반원 정책 실행

   ⓐ 기철 등 부원배(附元輩) 제거

   ⓑ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 혁파

   ⓒ 원의 연호 사용 중지, 관제를 문종때 것으로 복구

   ⓓ 평리(評理) 인당(印)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 :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략

   ⓔ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 : 쌍성(雙城) 지역을 쳐서 회수

   ⓕ 중국 대륙의 정세변동을 빨리 파악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 방국진(方國珍) 등의 군웅과 자주 교류

  ④ 원의 반발

   ⓐ 원과 정면으로 대결할 준비가 미비

   ⓑ 원의 연호 사용

   ⓒ 서북면을 공략했던 인당을 베어 사과한 것

  ⑤ 1368년, 명 건국 : 원의 연호 사용 중지하고 명과 정식으로 국교 관계를 맺음

  ⑥ 익군(翼軍) 조직

   ⓐ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지용수를 서북면원수로 임명 : 동녕부(東寧府) 정벌

   ⓑ 랴오둥의 중심지인 랴오양 공격, 탈취

  ⑦ 반원친명정책(反元親明政策) :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의 대립 초래

 ⑶ 시역사건(弑逆事件)

  ①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 소홀

  ② 1371년, 실정을 거듭하는 신돈마저 귀양보내 사사(賜死)

  ③ 1372년, 공신 및 고위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 설치

  ④ 익비(益妃)가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윤(洪倫)의 아이 임신

   ⓐ 환관 최만생이 이 사실을 고함

   ⓑ 공민왕 : 자신의 자식으로 속이려고 홍륜 등을 죽이려다가 되레 피살

   ⓒ 딸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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