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몽(고구려)
(1) BC 57년, 졸본
(2) 졸본 위치 : 압록강 상류인 비류수(혼강)가의 분지
① 오지(奧地)
②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인 대처 가능
2. 유리왕(고구려)
(1) 3년, 국내성(지금의 지안시) : "땅도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라고 사슴과 물고기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2) 국내성 위치
① 백두산 아래 압록강변
② 위로 압록강 연안에서는 드넓은 들판
③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타고 내려가 서해에 닿아 수로 이용 가능
(3) 환도산성(산성자산성) :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
① 방어성
② 고구려 산성의 석축기술을 잘 보여주는 석성
③ 요동 등지의 여러 세력들이 연달아 고구려를 공격 : 209년, 왕도를 일시 환도성으로
④ 관구검 및 연나라 침입 : 장기 대비책으로 대동강가에 평양성을 쌓기 시작
3. 장수왕(고구려)
(1) 남진 정책
(2) 427년 평양(대성산성)
① 북쪽으로는 산줄기를 따라 압록강과 국내성으로
② 남쪽으로는 대동강을 넘어 묘향산 줄기로
③ 산 높이는 274m : 대동강 주변에서는 가장 높아서 들판이 모두 한 눈에
(3) 평양 위치 잇점
① 대동강을 통하여 서해로 넘나들 수 있는 수운과 해운의 요지
② 중국과 멀어 안전지대 역할
③ 남쪽으로 진출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
※ 멸망할 때까지 도읍 옮기지 않았다 : 도읍관이 들판을 중시한 쪽으로 바뀐 것
4. 온조(백제)
(1) BC 18년, 백제 건국
(2) 위례성 : 한강유역
① 오래 전부터 선주민들이 집단 거주
② 충적토가 깔려 농업생산에 알맞았고 물고기가 풍부하게 서식해 사람 살기에 적합
5. 문주왕(백제)
(1) 475년, 장수왕
① 위례성 공격
② 아차산 밑에서 개로왕 사망
(2) 475년, 웅진(지금의 공주)
① 산악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이 금강에 닿아 있어서 방어 요충지
② 평야지대를 버리고 좁은 요새를 택한 것
(3) 신라의 계속된 압박
6. 성왕(백제)
(1)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
(2) 부여 부소산 : 서쪽으로 백마강, 동쪽으로는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① 웅진보다 방어의 요새가 되지 못한 듯
② 백마강 쪽으로 수운이 원활하게 트여 있는 이점
(3) 백마강(금강) 강변
① 넓은 평야지대
② 높은 농업 생산성
7. 신라 : 경주
(1) 왕족과 귀족들이 수도를 옮기려 하지 않은 것
① 경주 주변에 거대한 조상의 무덤을 받들고, 많은 토지를 소유
② 경주를 떠나면 조상 무덤의 권위와 재부(財富)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한다고 생각 : 신라의 지배구조는 귀족중심사회
(2) 신라 귀족 : 현실 안존적이어서 북방 진출의 의지가 없었다
① 공한지나 다름없는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의 지역으로 진출할 뜻이 없었다
② 동해를 통한 발해와도 교역을 활발하게 벌이지 않았다
8. 왕건(고려)
(1)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건설
(2) 919년, 철원 → 송악(지금의 개성) : 상업세력의 후예인 그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
(3) 송악, 개경
① 압록강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한반도의 중심부는 북위 37도 선상
② 한반도 지형의 특징인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한 가운데에 위치
③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 있어 병풍을 둘러친 모습
④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조건
⑤ 오래 버틸 입지조건은 갖추지 못하고 있다
(4) 약점 : 가까운 곳에 큰 물이 흐르지 않는다
① 용수(用水) 부족
② 곳곳에 많은 우물 조성
③ 금산(禁山)정책 : 주변 산의 나무를 보호
(5) 교통, 상업적 측면의 입지조건은 뛰어난 편
① 예성강 입구에 있는 천연의 항구 벽란도와는 30리 거리
② 남쪽으로 임진강 하류를 통해 한강과 연결 가능
(6)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지정 : 제 2 의 수도
① 틈틈이 서경 행차
② 과거 시행
③ 동명왕릉에 제향
④ 북방진출 의지를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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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성계(조선)
(1) 계룡산 일대로 천도(遷都) 시도
① 계룡산 : 남쪽에 치우쳐 있고 배산역수(背山逆水)여서 패망할 지세
② 반대 여론
③ 1년쯤 진행된 공사 중지
(2) 1394년, 한양(지금의 서울)
①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
② 정도전의 적극적 협조
③ 무학대사와 풍수가들의 조언
(3) 주거 지역 지정 : 도성 길이 60여리
① 궁궐, 종묘, 관아거리 지정
② 궁궐과 종묘 사이의 뒤편(북촌 일대) : 고위 벼슬아치
③ 남산 아래 낮은 지대 : 낮은 벼슬아치
④ 청계 냇가 : 상인
(4) 한양의 궁궐과 관아, 방리(坊里)와 길, 개인 주택은 산과 평지를 자연스럽게 이용한 탓으로 도시 규모가 정연한 모양은 아니었다
(5) 사대문 안
① 주민 10만여명이 살도록 만든 계획도시
② 중세 국가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는 도시
③ 중기 이후 도성 안에 약 20여만명 거주
10. 광해군(조선)
(1) 정씨 왕조설 : 《정감록》을 금서로 지정
(2)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궁궐, 관아 건물, 벼슬아치 집 거의 소실
(3) 1612년, 개혁의 일환으로 천도 도모
① 세도가 : 개혁정치를 방해
② 민심 : 이반 → 정씨 왕조설
(4) 술사 이의신 상소문 : "임진년의 병란과 역적의 변이 잇달아 일어난 것과, 조정 신하들이 당파로 갈라진 것, 서울 주변의 산들이 벌겋게 벗어진 것 모두가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잔한 소치이니 교하(交河·임진강 입구)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5) 많은 신하들의 반대속에서 교하에 토목공사 시작
①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면서 지원군을 요청 : 공사 중지
② 1만5천여명의 지원군 경비 마련 → 재정 부족 → 좌절
11. 정조(조선)
(1) 1794년부터 화성(華城) 쌓기 공사에 착수
① 정약용의 거중가(起重架) 이용
② 성 쌓기에 일반 백성이나 예전처럼 승군(僧軍)을 불러내지 않았다
③ 인부와 장인을 모집해 노임을 주고 거처를 제공
③ 2년7개월 만에 성 쌓기 공사 완성
(2) 화성(지금의 수원)
①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을 따라 쌓은 평산성
② 성 중간에 작은 냇물이 흐르며 평지에는 방어호를 둘렀고 총 둘레는 5,520m
③ 특징
-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전통적 형태가 아니라 벽돌을 섞어 사용 : 돌 규격을 맞추어 축조
- 주민이 거주하는 읍성 기능
- 방어성 역할
(3) 화성을 쌓은 뜻
① 외적의 침입 루트가 아니다
② 상업지역으로 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거대한 성을 쌓은 의도 : 천도를 위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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