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洞夷)문명 발상지… 일제도 "한국 땅"
청, 영토 야심에 18세기 백두산정계비 건립
토문강 위치 "송화강 상류" "두만강" 분쟁
일제(日帝)가 만주침략 정책위해 청에 불법 할양
1. 간도 역사
(1) 고조선의 건국에서 시작 : 홍익인간의 건국이념과 중국의 황화문화에 결코 손색 없는 동이문명을 형성
(2)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 계승
(3) 발해 멸망 후에는 동이계인 거란ㆍ여진ㆍ몽골족이 이 지역을 지배
(4) 반만년 역사 중 우리 민족이 이 지역을 통치한 시기가 3,300년 이상
(5) 다른 동이계 민족(요, 금, 원, 일본)은 683년, 한족(漢族)은 고작 500년
→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는 별개 지역으로 보는 것이 당연
2. 고려 : 고구려 적통을 계승했다고 표방
(1) 예종(1107년) :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두만강 700리 북쪽에 있는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국경으로
(2) 공민왕
① 원ㆍ명 교체기에 명이 아직 고구려의 영토였던 랴오닝(遼寧)ㆍ선양(瀋陽) 일대를 점유하지 않은 허점을 이용
② 북방영토 회복을 추진
③ 1370년, 이성계 :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랴오닝ㆍ선양 지역)를 정벌,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
④ 1370년, 지용수와 이성계는 랴오닝성을 공격, 크게승리
⑤ 동녕부에 랴오닝ㆍ선양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통고
⑥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후 4대가 원나라에 입사하여 두만강북 일대를 통치
3. 조선
(1) 세종때 김종서
① 6진 개척
② 강북의 여진족들은 조선에 거의 복종하는 상태 →이후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을 침입
(2) 1627년, 강도회맹 체결
① 간도분쟁의 시발
② 간도지역을 봉금하여 무인(無人)지대로
(3) 러시아의 흑룡강 연안 진출 : 청이 이 무인지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
①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② 강희제 : 선교사를 특파, 백두산 일대를 지도로 그려가는 등 만주 일대 영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 → 백두산정계비 건립
(4) 숙종 36년, 이만건 월경사건으로 청 사람 5명이 살해된 사건 발생했을때 청의 반응
① 조선과 국경을 분명히 정할 계획으로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1712년 5월 15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② 비문 내용 :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
(5) 목극동의 오류
① 토문강의 수원이 동에서 발원하여 동북 방향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을 몰랐다
②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ㆍ석을수 양수가 합류하는 것을 토문강의 원류가 양수와 합류하는 것으로 잘못 안 것
③ 목극등의 오류를 박권이 지적했지만, 목극등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④ 설표(設標)공사를 시찰한 북평사 홍치중도 오류를 확인
⑤ 조선 : 토문강의 위치를 송화강 상류로
⑥ 청 :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주장
→ 간도분쟁의 원인
(6) 1860년대 북관지방의 수해와 흉년으로 인하여 간도와 연해주로 도강하는 이주민 증가
① 러시아와 청 : 조선인의 귀환을 요청
② 청 : 1878년, 압록강 이북의 봉금지역을 개방하면서 1882년, 길림장군 명안(銘安)이 토문강 이북ㆍ이서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조선에 이들을 데리고 가도록 요청
→ 국경논쟁 시작
(7) 국경 논쟁
① 청 : 도강한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낸다고 고시
② 조선인들은 이 고시가 부당하다고 이정래 종성부사에게 호소
③ 어윤중 서북경략사 :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청에 제기
- 김우식을 시켜 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를 답사
-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고 간도지역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
(8) 1885년, 을유국경회담 : 토문강을 국경으로 보는 우리 측의 주장과 두만강 상류인 도문강을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청의 억지로 회담은 결렬
(9) 1887년, 2차 정해국경회담 :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
(10) 1887년 조선, 관찰사 조존우
① 국경분쟁문제를 철저히 조사, 보고
② 공법회통을 인용해 국제공법상 토문강이 한ㆍ청간의 경계
(11) 1898년, 간도문제와 관련한 상소가 있자 내부대신 이건하의 지시로 경원군수 등이 국경답사보고서 제출
① 肩릿OO阿OOO오륙백 리를 흘러서 송화강과 합하여 흑룡강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과 발원지로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흑룡강 하류 동쪽은 우리의 땅이다" 우리나라는 변경의 분쟁을 염려하여 유민을 엄금하고 땅을 비웠다.
② 청이 이를 선점하여 자기 땅이라 하고 러시아에게 천 여 리의 땅을 할양했으니, 토문강으로 정계한 것으로 보면 이것을 용인할 수 없다
③ 민생이 이로써 곤란을 받고 변경문제가 늘어가니 한국, 청, 러시아 3국이 함께 답사하여 각국 통행의 국제법규에 따라 공평히 타결해야 한다
※ 토문강이라는 명칭
① ‘전요지’와 ‘요동지’에 ‘토문하(土門河)’로 나온다
② ‘장백산 북의 송산에서 원류가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는 기록도 있다
(12)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
(13) 1900년, 평북관찰사 이도재 :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
(14) 1902년 5월, 이범윤
① 간도시찰사로 임명 받아 간도 조선인을 위무 : 당시 간도 일대의 인구는 2만7,400여 호, 약 10만명
② 간도 한인의 보호를 위해 진위대병의 간도 파병 등을 조정에 요청 : 조정에선 불허
③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
→ 계속된 간도분쟁 → 조정 내의 권세쟁탈 야기 → 이범윤이 건의한 간도 파병문제는 당시 내부대신, 경무대신, 원수부 장관 등의 알력으로 미결정 → 변계관 : 간도 한인보호보다 이범윤을 물러나게 하는 쪽이 낫다고 보고 청의 지방 관리들과 1904년 한ㆍ청 변계선후장정까지 임의 약정 → 이범윤과 사포대의 활동이 억제 → 간도의 실제 관할권은 청으로
(15) 일본 :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간도분쟁에 개입
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을사늑약 체결하여 간도문제 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든 다음, 박제순으로 하여금 1906년 11월 8일 통감부에 외교교섭을 내도록 조작
- 러일전쟁 중에는 한ㆍ청 간의 간도문제 조기 타결을 우려하여 청에 국경문제 논의를 늦추도록 요청
② 러일강화조약 :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만주의 특수 이익 인정, 획득
③ 1907년, 이토 히로부미 : 간도에 사이토(齊藤季次郞) 중좌 일행을 파견하여 파출소를 개설
→ 청ㆍ일간에 간도문제에 관한 외교교섭이 전개
④ 이토 히로부미 : "간도는 한국영토임을 전제"했지만, 교섭 당시에는 청에 ‘간도는 소속 미정의 영토’라고 통보
- 1908년 4월 일본은 간도에 한인과 일본인의 잡거를 인정
- 일본영사관 설치 : 한인 재판권을 담당
- 두만강을 한ㆍ청 국경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전환 : 청은 종전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16) 청일 양국 교섭
① 1909년 2월, 일본이 간도 할양을 포함한 동삼성 6안을 청에 제시하면서 진척되기 시작
② 1909년 9월 4일, 간도를 청에 양보하는 간도협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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