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 궁녀에 대한 최초 기록 : 조선 초 시집 <속동문선> 제 5 권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전하길 부여성 북쪽에 큰 바위가 있었다.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않겠다”하였다. 바위아래 강에 수신하여 죽음을 당하니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백제 멸망이후 타사암을 미화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백성들의 과음이 심해지자 세종대왕이 “신라가 망한 것이 포석정의 술판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도 모두 술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고 말한 것(세종실록 15년 10월 28일 정축 조)으로 보아 이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흔히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낙화암에서 궁녀가 떨어져 죽은 것은 사실인데 과연 그 궁녀 수가 정말 3000명이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당시 호적에 등록된 집은 총 76만호(戶)였으며 총 인구는 약 400만명 정도였다.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 인구 약 5만명정도로 추측되는데 그렇다면 2500명 정도의 군대가 있었다고 추리해볼 수 있다.
백제 인구 어디를 살펴보아도 궁녀 3000명을 거느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믿을만한 어떤 기록에도 '삼천 궁녀'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보면 '삼천'은 그냥 “아주 많다”는 뜻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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