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 부대 내에서 대검으로 민간인 학살 '충격'

 (1) 1980년 5·18 당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시민을 그것도 군 부대 안에서 대검으로 무참히 살해한 사실이 군 관계자의 증언과 문서로 확인 
 (2) 2006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18 당시 군인들에 대한 면담보고서에서 확인 
 (3) 백남이 대령(당시 전교사 작전 참모)

  ① "1980년 5월 21일 전교사 사령부 운동장 광장에서 젊은이 하나를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② "이 상황은 김순현 전투발전본부장 등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 
 (4) 이인권(11특전여단 62연대 본부 중대장)

  ① "오인사격 현장으로 상황파악을 하러 갔다 오니 거적에 덮인 시체 1구가 보였다"

  ② "병사들에게 물으니 4지역대 중사가 체포해 온 시위대 1명을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였다고 했다"

 

2.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한 잔혹한 양민학살은 1996년 검찰의 수사기록에서도 확인 
 (1) 최규진(5·18 당시 11특전여단 제4지역 대장)씨의 서울중앙지검에서 한 진술

  ① "대검은 개인휴대장비로 가지고 가 무력시위 때 착검을 하고 무력시위를 했다"

  ② "시위대에 대한 사용에 대해서는 원 주둔지로 복귀해 들어보니 저의 62대대 4지역대 소속이었던 모 중사가 잡아온 시위대에게 대검을 사용해 시위대 1명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③ "제가 중사에게 물어보니 시인을 해 제가 왜 그런 일을 했냐고 때린 일이 있는데 그 외 대검을 사용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 현장의 계엄군

 ① 시위 상황과 무관하게 대검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

 ② 대검 사용에 대한 통제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

3. 계엄군의 잔혹함 
 (1) 계엄군의 광주 송암동 지도와 오인사격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일지 : 1980년 5월 24 오후 2시 시민 1명을 즉결 처분했다는 내용이 추가로 확인 
 (2) 증언은 있었으나 실제 군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던 내용 중에 화순너릿재 터널 봉쇄 사건

  ① 터널 봉쇄를 위해 트럭을 터널 안으로 밀어 넣고 불을 지른 후 트럭운전사가 되돌아 나오는데 그 트럭 운전사를 향해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 : 11특전여단의 전투상보에 구체적으로 기록 
  ② 피해자들이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에 포함돼 있지 않다 : 행방불명되거나 암매장됐을 가능성 등에 대한 추가 조사 필요 
 (3) 전투기 출격 대기, 헬기 사격 증거도 추가 확인

  ① 군 문서인 11특전여단 전투상보의 송암동 오인사격 상황도

  ② '건십 2대 공중 엄호'로 기록 : 건십이란 무장된 상태의 전투기 
 (4) 행정 기관과 민간 문서에서도 계엄군 잔혹함에 대한 많은 증거 확인 
  ① 1980년 5월 19일 오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일어난 장갑차에서의 계엄군 최초 발포 피해자가 '김영찬'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② 당시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와 전남대학교병원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부상자는 모두 6명으로 확인

  ③ 당시 현장에서의 발포가 일회성 총격이 아니라 다발성 총격을 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이다.

  ④ 이미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분배돼 있었거나 적어도 시내 일원에 투입됐던 장갑차에는 실탄이 탑재돼 있었던 것을 입증 : 실탄을 철저하게 통제했다는 계엄사의 발표 또한 허위 
 (5) 2018년 10월 정부합동조사반의 조사 : 17명의 성폭행 피해

 (6) 대인동 공용터미널 부근의 '대인동 집창촌'에서 19일과 20일 밤 계엄군들이 여러 차례의 집단 성폭행과 금품을 탈취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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