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군부, 5·18 사전 준비…1980년 5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5월 10일 준비
 (1) 신군부 주장

  ① "5·18 당시 군의 발포 명령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이뤄졌다", 

  ②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2) 계엄군 회의록과 육군참모총장 근무일지 : 5·18이 1980년 5월 10일부터 준비됐다

 (3) 계엄사 합수부

  ① 5월 10일부터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 시작

  ② 휴교령과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한 정황이 확인

   → 계엄 회의에 참석한 계엄사 합수부 관계자의 발언으로도 확인 

2.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

 (1)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 "11공수특전여단을 광주에 추가로 투입한다"

 (2) "지금 광주에서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로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3) 조사 결과 실제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 시각은 5월 18일 오후 4시

  ①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도 전에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있어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고 언급한 것

  ② 정 전 특전사령관의 발언 : 5·18이 사전에 준비됐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3. 미 육군 군사 정보관을 지낸 김용장 : "5·18은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2019년 5월 광주 방문 당시 진술)

 (1) "계엄군의 광주 진압은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이라는 목표 아래 이뤄졌으며 광주는 크기와 위치 등에서 신군부의 적당한 목표물이 됐다"

 (2) "대구나 부산은 지역이 넓고 신군부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타깃이 될 수 없었다" 

 

4. 1980년 5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의 근무일지

 (1) 1980년 5월 17일 오전에 주요 지휘관 회의와 특전사령관 보고가 진행

 (2) 이후 국방부 주요 지휘관 회의와 보안사령관 방문, 청와대에 보고

 

  ※ 5월 17일 밤 9시 40분쯤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의결 : 사전에 국방부와 육군본부, 보안사령부 등과의 치밀한 준비를 토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된 사실이 확인된 것

5. 5월 27일, '충정작전' : 22일 계획…미국 일정 등 고려해 연기
 (1) 계엄사령부 부사령관 : 계엄군 회의록

  ① "광주 난동은 금일 조기 일대소탕전(일망타진) 코저 하였으나 미군의 지원과 타이밍을 조정하기 위해 연기했다"

  ② "군은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폭도와 분리되는 시점을 기다렸다"고 주장한 대부분의 군 기록과 상충

  → 계엄사령부가 1980년 5월 21일 오후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다음날 진압작전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군 문서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 
 (2) 1980년 5월 23일, 계엄사령부 회의록 (육군참모총장) : "금일, 2군 사령관이 진압계획을 가지고 온다"

  → 계엄군은 5월 27일 진행한 충정작전을 애초에는 5월 21일 퇴각 직후에 실행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던 것

 

6.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된 5·18 사전 계획설 입증은 5·18 민주화운동 의의 격하?
 (1) 신군부에 의해 5·18이 사전 기획설은?

  ①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격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 초래 가능성 발생

  ②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이 주체적으로 항쟁을 이끌어 나간 것이 아니라 신군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갔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2) 5·18이 신군부의 사전계획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의의는 퇴색되지 않는다 
  ① 1980년 5월 이전에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규모와 강도로 저항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

  ② 5·18 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 : "신군부가 5·18을 사전에 준비했다는 정황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며 "신군부의 계획을 토대로 5·18이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광주를 해방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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