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반응
① 모스크바 삼상회의 ⇒ 해방 이후 최초로 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
ㄱ. 미국, 영국, 소련 등이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를 열고(1945. 12. 16) 전후문제를 논의
ㄴ. 소련과 미국의 주장이 절충되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 만들어짐(1945. 12. 27)
* 결정사항 -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 미・소 공위는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와 상담할 것
- 미・소・영・중이 조선을 5년 동안 공동관리(신탁통치)
② 삼상회의 결정안의 반응 ⇒ 해방이후 좌・우익은 신탁통치 찬・반탁으로 최초로 대립
ㄱ. 우익세력 -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가세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여 반탁운동을 벌임
ㄴ. 좌익세력 -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한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만들어 삼상회의 결정안을 지지
2)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
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 3. 20)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 개최되었으나 서로 자국의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해관계가 달라 결렬됨
②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지만 좌익은 물론 한독당에서도 반대
③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 5)도 미국과 소련이 의견대립으로 실패
3)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①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둘러싸고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를 통합하여 남한에서의 안정적인 정치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구상
②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지지 속에 여운형,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지만 좌우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모임으로 발전
③ 좌우합작운동의 좌우익 대립
ㄱ. 좌익세력 : 민전이 좌우합작 5원칙 발표해서 남한에도 시행할 것을 요구
* 좌우합작 5원칙 :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 아래 토지개혁 실시, 친일파 처단, 정권을 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
ㄴ. 우익세력 : 좌우합작 5원칙에 대응하여 합작 8원칙 제시
* 합작 8원칙 : 친일파는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에 특별법을 만들어 처단, 신탁문제에 유보적인 입장
④ 합작원칙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으나 좌우익 정치세력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한 합작원칙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한계에 부딪침
4) 9월총파업과 10월봉기
① 해방 뒤 조선의 경제는 생산의 감소와 대량실업, 물가상승으로 커다란 혼란에 빠짐
② 미곡정책에 있어서도 배급제로 바꾸고 미곡공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짐
③ 미군정 정책에 대해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늘어나면서 9월총파업과 10월봉기가 일어남
④ 9월총파업
ㄱ. 철도노동자들이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는 민군정에 맞서 파업이 시작되어 전 노동자로 파급
ㄴ. 파업 초기에는 임금인상,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실시, 식량배급 등을 요구하였으나 그 뒤에는 좌익정치범을 석방하라는 등 정치적 요구를 내세움
ㄷ. 미군정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진압
ㄹ. 대구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됨
⑤ 10월봉기
ㄱ. 대구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 미군정 경찰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가두시위로 이어져 시위는 인근도시와 농촌으로 확대
ㄴ. 쌀 배급량 증대, 경찰의 발포금지와 애국자의 석방 등을 요구
ㄷ. 경북, 경남, 전라, 충청, 제주 등 전국적으로 파급
ㄹ. 미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
⑥ 9월총파업과 10월봉기를 겪으면서 좌익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우익세력은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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