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시대상

 

 ① 근친혼(近親婚) 허용

 ② 왕족 혼례문제에서 왕의 명령이 절대적


1. 신라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덕만공주(자매지간)와 김용춘, 김용수(형제지간)는 5촌 당숙지간


2. 천명공주와 김용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3. 진평왕 

 ⑴ 천명공주와 장남인 김용수를 혼인시켰고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

 ⑵ 고구려가 신라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한 사건 발생

  ① 천명공주, 김용수 : 즉각적인 군사 대응 주장

  ② 덕만공주 : '고구려 군사가 아닌 흉년으로 인한 고구려 유민 짓'일 수도 있으니 확인해봐야 한다고 피력하면서 자신의 패물을 내어 놓는다. "고구려 유민이면 이것으로 그들에게 구휼미를 주면 신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③ 이때의 일로 진평왕은 다음 왕위를 덕만공주로 낙점

  ④ 천명공주, 김용수를 출궁시킴


4. 덕만공주 → 선덕여왕

 ⑴ 김용춘(언니 천명공주의 옛 연인)을 남편으로

 ⑵ 덕만공주 : 김용춘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아 '색공'을 밤마다 들여 후사를 이을려고 시도

 ⑶ 김용춘은 자처해서 출궁

 ⑷ 김용수를 남편으로 → 덕만공주는 선덕여왕이 됨

 ⑸ 천명공주와 김용춘은 다시 만나고 이들은 아들을 낳는다 : 아들 이름은 김춘추 (훗날 태종무열왕)

 ⑹ 김용수 : 전투에서 사망

 ⑺ 김용춘을 다시 남편으로


위의 이야기는 박창화, 『화랑세기』필사본(1930년대)에 있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김용수'를 '김용춘'이라고도 한다라고 적혀있으나 박창화, "화랑세기 필사본"은 둘은 형제지간이라 되어있다. 그 이유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일운"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동일인에 대한 다른 칭호로 볼 수 없고 만약 동일인이라면 7년만에 '이찬에서 파진찬'으로 2단계 강등한 것인데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2년에 발굴된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로이 판독되면서 황룡사 9층목탑을 감독한 '김용춘'이 '김용수'와 같은 인물임이 증명되어 두사람이 형제지간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고 이 책이 위작(僞作)이라는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된다.


김대문, 『화랑세기』와 박창화의 『화랑세기』필사본은 다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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