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의 태(胎)를 묻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에 의해 지금은 태실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무태와 연경동 일대에 인천 이씨(仁川李氏)들이 많이 살았는데 서변동 일대는 무태파, 연경동 일대는 태봉파라고 하여 서로 갈라져 있었다. 조선이 망하자 무태파에서 폐주(廢主)의 태실이라 하여 이를 파괴하려고 해 이를 반대하는 태봉파와 알력이 생겼고 무태파가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파괴되었다.


또 다른 설(說)을 보면, 일제 초 인천 이씨의 한 집에서 태실 자리가 정승이 날 명당 자리라 하여 바로 밑에 부친 묘를 쓰다가 맏상주가 죽고 둘째 상주도 죽었다. 그래서 점을 치니 태실을 깨뜨리라고 해서 석물을 깨뜨려 봉우리 밑 태봉 못에 버렸는데 그날 밤에 손자가 죽었다. 다시 굿을 해보니 석물을 원상태로 해놓으라고 해서 다시 원상태로 해놓았다.(연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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