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국경회담’ 때 한·중 대표가 직접 작성… ‘백두산정계비~송화강이 국경’ 확인

 

두만강 이북의 간도(間島) 지역이 조선의 땅이었음을 보여주는 중국 측 지도가 발견됐다.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논의했던 1887년 ‘제2차 감계(勘界)회담’ 당시 그려진 이 지도는, 회담 당사자였던 조선 측 감계사 이중하(李重夏)·팽한주(彭翰周)와 중국 측 감계관 팡랑(方朗)·더위(德玉)·친잉(秦煐) 등 5명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와, ‘한·중 양국의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문강을 따라 쌓았다’(숙종실록 권52)는 토퇴(土堆)·석퇴(石堆)의 위치가 명확하게 표기돼 있다.


2차 감계회담 당사자였던 한·중 대표가 직접 제작한 지도. 국경을 표시하는 석퇴·토퇴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당시 국경이 백두산 정계비~송화강으로 연결되는 선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 따르면, 당시 국경을 표시했던 토퇴·석퇴는 두만강과 상관없는 별개의 강을 따라 만주대륙을 거슬러 올라가며 설치돼 있다. 이것은 한·중 두 나라 대표가 (두만강이 아니라) 백두산 정계비~송화강(松花江)으로 이어지는 선이 당시의 국경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사료임은 물론 ‘토문(土門)과 두만은 같은 강’이란 중국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물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원로 정치학자 노계현(盧啓鉉) 박사는 지도를 공개하면서 “이 지도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설정된 한·중 국경을 2차 감계회담 당사자들이 다시 한번 확인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길림문화출판사가 1993년 11월 발간한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 楊昭全·孫玉梅 著)에도 수록돼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李相泰) 사료조사실장은 이 지도에 대해 “2차 감계회담을 가진 한·중 양국 대표들은 함께 국경선을 답사한 뒤 두 장의 지도를 그려 각각 보관했다”며 “이 지도는 그 두 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실장은 “이는 두 나라 외교사절이 작성한 공문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한 뒤 “이것은 당시 한·중 양국이 국경으로 정했던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별개의 강’임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아직까지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료”라고 말했다.


영토 문제를 연구하는 인천대학 노영돈(盧永暾ㆍ국제법)교수는 “이 지도는 한·중 간에 설정된 국경이 백두산 정계비~송화강으로 이어지는 선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임을 보여준 1909년 총독부 지도(2004년 9월 9일 조선일보 1면)와 함께 간도가 조선땅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그는 “1887년의 감계회담 이후 한·중 양국간 국경 문제가 공식 논의된 바 없기 때문에, 향후 간도를 둘러싼 영토 논의는 1712년 설정된 정계비~송화강 라인을 바탕으로 재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측이 ‘중한감계지도(中韓勘界地圖)’라 이름붙인 이 지도에는 ‘1887년 중조 제2차 감계지도(中朝第二次勘界地圖)’란 부제가 붙어있다. 왼쪽 위편엔 광서십삼년오월이십육일(光緖拾參年伍月貳拾陸日)이란 제작 날짜가 기록돼 있다. ‘광서(光緖)’란 청나라 덕종(德宗)의 연호로, 광서13년은 1887년을 뜻한다. 날짜 밑에는 중국 감계관 팡랑·더위·친잉의 이름과 함께, 조선 감계사 이중하·위원 팽한주의 이름이 병기돼 있다. 지도 중앙 밑부분엔 ‘매촌이리(每寸二里), 매방사십리(每方四十里)’란 축척이 방위와 함께 표시돼 있다.


러시아판 아시아 지도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역을 조선 영토로 그렸다.


“토문=두만강” 중국 측 주장 뒤엎어

 

간도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대황(大荒)’이라고까지 불렸던 황무지다. 한·중 양국 모두로부터 외면당해 수백 년간 국경조차 명확히 설정돼 있지 않았던 이 땅에 ‘영토논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진족이 대륙을 장악하면서부터다.

 

두만강 북쪽, 지금의 만주 일대에서 발원해 중국 대륙을 점령한 여진족은 자신들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족 발원지 ‘부쿠리산’이 백두산이라 믿고 있었다. 1616년 만주에 청(淸)을 세운 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신성시, 이민족인 한족(漢族)이 성지(聖地)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이른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폈다.

 

하지만 간도를 조선땅으로 여겨왔던 한인(韓人)의 유입은 계속됐고, 그 결과 농지 등과 관련된 분쟁이 빈발했다. 청의 강희제는 국경을 명확히 설정, 한인의 유입을 막고 ‘성지’ 백두산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의도로, 1712년(숙종 38년) 5월 ‘오라총관’(오라·烏刺=만주) 무커덩(穆克登)을 파견해 조선과의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라고 명했다. 조선은 참판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무커덩은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해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워 국경을 정했다. 이때 새겨진 비문이 유명한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러(西爲鴨綠 東爲土門), 분수령상의 돌에 이를 새겨 기록한다(分水嶺上 勒石爲記)’는 것이다.


문제는 토문강의 흐름이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이 강은 일정 유역 물이 흐르다 땅 속으로 들어가 물길이 끊어지고, 또 다시 얼마 후 물길이 나타나 땅 위로 흐르기를 반복하는 복류천이었다. 따라서 중국 측 대표였던 무커덩은 “두 나라의 백성이 국경을 명확히 알도록 하기 위해, 혹은 나무 혹은 흙 혹은 멀고 가까운 형편에 따라 표를 세우고, 조선에서 (청에) 동지사를 보낼 때 공사의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고 말했다. 이에 조선은 목책(木柵)과 석돈(石墩=석퇴)·토퇴(土堆) 등을 쌓아 국경을 정하게 된다.(숙종실록 권52)


1789년판 세계 지도 : 간도를 조선 영토로 그렸으며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했다.


‘백두산정계비’ 이후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1883년 청이 “두만강 이북의 조선인을 1년 내에 추방한다”는 고시를 내면서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충돌이 생기자 조선과 청은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감계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 국경회담에서 청은 “토문(土門)은 도문(圖們)·두만(豆滿)과 같은 강”이라며 “두만강을 경계로 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토문이 송화강 지류로 인정될 경우, 만주 일대는 물론 흑룡강성 일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 조선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회담은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지도를 공개한 노계현 박사는 “당시 중국 대표는 조선 측에 대해 자기들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사살하겠다’고 위협하고, 조선 제도사 지창한(池昌翰)이 말을 듣지 않자 그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일본 외무성 육해군성 ‘간도 영유권관계 발췌문서’)며 “이러한 상황에서 토문강의 이름을 지도에 기입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영돈 교수는 “백두산정계비에서 법적 효력을 가진 표현은 분수령”이라며 “이 분수령이 어디냐에 따라 당시 양국이 합의했던 국경이 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이번 지도는 정계비가 세워졌던 분수령 위치는 물론, 양국 합의에 의해 설치됐던 석퇴·토퇴의 위치가 두만강과 다른 강을 따라 올라갔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간도가 조선 땅임을 밝혔다”고 말했다.

 

‘간도협약’ 법적 효력 없어

 

조선과 청의 영토논쟁에 변수로 개입한 것은 일본이다. 1895년 청·일전쟁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1906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에게 공문을 보내 간도의 한인 보호를 요청했다. 의뢰를 받은 일본은 1907년 8월~1909년 2월까지 약 2년에 걸쳐 청과 간도에 관한 회담을 벌였다. 회담이 지지부진해지자 일본은 1909년 2월 6일 ‘동삼성 육안(東三省六案)’이란 방안을 내놓아, 청나라가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가 1909년 9월 4일 베이징에서 체결된 간도협약과 만주협약이다.

 

간도협약은 동삼성 육안 중 ‘후 1안’ 즉 ‘청에 간도를 넘긴다’는 내용을 조약으로 만든 것이고, 만주협약은 ‘청은 일본에 철도·탄광 등 5가지 이권을 준다’는 내용의 ‘전 5안’을 조약으로 삼은 것이었다.(1996년 1월 15일 외교부 비밀해제 문서 ‘간도문제와 그 문제점’)



노영돈 교수는 “간도협약은 청·일 간에 체결된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제3국인 대한제국에는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며 “국제법상 조약은 하자(瑕疵) 없는 의사표시에 의해 체결돼야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강박(强迫)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은 무효이며, 일제가 을사조약을 근거로 청과 체결한 간도협약 역시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무효”라는 것이다.

 

유사한 견해는 유럽의 언론·학계서도 제기된 바 있다.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10일 뒤인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황실고문 헐버트(Hulbert)에게 전문을 보내 ‘조약은 강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 사실을 만방에 선포할 것’을 지시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은 1906년 1월, 프랑스는 1906년 2월에 각각 신문과 논문으로 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했다.(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 조약 휘찬’ 1964년)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보는 법리는 또 있다. ‘국제법위원회 1972년 연감’은 ‘보호국이 체결한 조약이 피보호국의 조약이 되기 위해서는 그 조약은 피보호국을 대리하여 또는 피보호국의 명의로 체결돼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간도협약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대한제국)의 이름으로, 혹은 일본이 한국을 대리해서 조약을 체결했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서 패한 일본은 ‘간도협약과 을사늑약을 포함, 대륙 침략과정에서 체결한 모든 조약과 이권 및 특혜를 무효 또는 원상회복시킨다’는 내용의 각종 문서에 서명했다. 1943년 12월 1일 선포된 ‘카이로선언’도 그 중 하나다. 이 선언은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도취(盜取)한 모든 지역을 반환케 하는 것이 미·영·중 3대 연합국의 목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선언 내용을 수락한다”고 명기해 ‘영토 반환’에 관한 법적 구속력을 인정했다.

 

일본과 중국은 1952년 4월 28일 ‘중·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중·일 양국은 1941년 12월 9일 이전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4조)”고 돼 있다. 노영돈 교수는 “이는 중국과 일본이 1909년의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며 “따라서 간도를 중국 영토로 삼으려는 행위는 평화조약 위배”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간도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지난 8월 한국을 찾아 우리 정부에 ‘간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 간도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 9월 10일 “간도문제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라며 “고증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신중히 다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유보적 입장임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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