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1881년 10월,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① 간도 지방을 개간하려고 이 지방을 답사

 ②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

 ③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 설치

⑵ 보고를 받은 청나라

 ① 1882년 초,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

 ②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 등 만주 지역의 청나라 관리

  ⓐ 이미 이주해있는 조선인 입주를 기정 사실화

  ⓑ 조세 징수, 호적 정리, 범죄자를 청나라가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

⑶ 1883년 9월이후,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

 ① 간도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

 ②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

⑷ 우리측 대응

 ①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

 ②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

 ③ 종성 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 호소

 ④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

  ⓐ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답사

  ⓑ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

  ⓒ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

  ⓓ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

  ⓔ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

 ⑤ 우리 정부 : 청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

 ⑥ 1885년 4월, 청나라의 혼춘 당국

  ⓐ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를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

  ⓑ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 추방

 ⑦ 우리 정부 :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 요청

  ⓐ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함

  ⓑ 간도 문제 :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

  ⓒ 간도 문제 :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

※ 두만강 상류 4개 지류 : 하류 쪽에서부터 서두수, 홍단수, 석을수, 홍토수

' 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의 적극 대책  (0) 2017.02.20
을유정해감계회담(乙酉丁亥勘界會談)  (0) 2017.02.20
귀속 문제 배경  (0) 2017.02.20
간도의 역사  (0) 2017.02.20
간도(艮島, 間島) 소개  (0) 2017.02.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