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도원의 기원.
 ⑴ 의의.
  ① 중세의 정신생활이나 문화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② 중세교회가 타락하고 世俗化되었을 때 이를 정화, 개혁하는 원동력.
  ③ 중세초 문화등불의 역할: 중세 후반기 문화성장을 촉진.
 ⑵ 생성원인: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 → 교회는 큰 재산의 소유자가 됨 → 세속화 현상 발생 → 초기 교회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남 → 이에 부합한 새로운 제도가 수도원.
 ⑶ 東方(동방)에서 시작.
  ① 3세기말 St. Antony.
  ② 4세기 St. Basil the Great.
   Ⓐ 수도원제도의 확립자.
   Ⓑ 수도원의 계율을 확정: 현재 그리스 政敎(정교)에서 통용.
 ⑷ 西方(서방): 4세기에 전해졌으나 뿌리를 못내림.
  ① 동방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서방 수도원이 확립.
  ② St. Benedict.
   Ⓐ 6세기 초, 베네딕트 계율을 마련.
   Ⓑ 베네딕트 계율.
    a. 淸貧(청빈)과 복종을 이상으로 하였다.
    b. 금욕적이며 엄격한 규칙적인 공동생활을 규정.
 ⑸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것: 수도사의 筆事(필사)작업.
 ⑹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토지를 소유: 자급자족.

 

2. 교회의 개혁운동.
 ⑴ 9세기 중엽 Frank왕국 붕괴: 교회는 혼란속에서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려고 노력.
 ⑵ Nicholas Ⅰ(858-867).
  ①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
  ② 사회의 봉건화에 따른 교회의 봉건화와 타락을 막지 못함.
 ⑶ 10세기초의 교황.
  ① Rome시 귀족 朋黨(붕당)의 首領(수령)에 불과.
  ② Otto Ⅰ 대관식후 독일황제가 교황임명권을 장악.
  ③ 황제의 세력이 물러나자 Rome귀족이 다시 교황을 임명.
  ④ 교회전체가 봉건화.
   Ⓐ 고위성직자: 봉건귀족층에 속하였다.
   Ⓑ 교구사제: 세속영주의 고용인에 불과.
 ⑷ Cluny수도원 중심의 개혁운동.
  ① 910년, Aquitaine公(공) William의 승인하에 설립.
  ② 승인장: 강력한 개혁의지를 표명.
   Ⓐ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신자들의 자유로운 獻納(헌납)으로 간주하고 봉건적인 의무를 지지 않는다.
   Ⓑ 수도원장의 선거권: 수도사에게 있다.
   Ⓒ 교황에 직속하고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 태만과 나태를 추방.
   Ⓔ 筆事(필사)작업과 공동예배에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⑸ 10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도 일어났으며 11세기 중엽 이후 교황의 영도하에 전유럽적인 규모로 전개: 최초의 개혁적인 교황 - Leo Ⅸ (1049-1054).
  ① 성직자의 정화작업을 추진.
  ② 유럽의 중심지를 순회하면서 개혁운동 실천을 督勵(독려): 그 결과 교황의 입법권, 사법권이 Alps 이북에도 효과적으로 발동.

 

3. 서임권 문제.
 ⑴ 9-10세기에 걸친 혼란속에서 성직자들은 강력한 국왕을 기대하였고 그에게 의지.
 ⑵ 국왕.
  ① 성직자 지명뿐만아니라 서임까지도 행사.
  ② 국왕의 世俗敍任(세속서임, Lay Investiture)은 권리남용이 아닌 당연한 권리행사로 생각.
 ⑶ 교회개혁자: 세속서임권에 도전 - 왕권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을 의미.
 ⑷ 로마 종교회의(1059).
  ① 교황선출에서 Rome귀족의 붕당과 독일황제의 개입을 배제.
  ② 교황선출: Rome교회의 樞機卿(추기경)이 한다. - 1061년, Alexander Ⅱ가 선출.
   Ⓐ 많은 개혁을 단행.
   Ⓑ 교황권이 全유럽으로 확대.
 ⑸ 서임권 투쟁: Gergory Ⅶ 대 Heinrich Ⅳ.
  ① Gregory Ⅶ.
   Ⓐ 교황권에 관한 규정을 마련.
   Ⓑ 교황에게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고 선언.
  ② Heinrich Ⅳ.
   Ⓐ 독일 국내의 반란 등 때문에 처음에는 타협적.
   Ⓑ 반란을 진압한 후 밀라노파 주교를 후원.
   Ⓒ Gregory Ⅶ를 찬탈자로 규정: Gregory Ⅶ는 Heinrich Ⅳ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
  ③ 카놋사 굴욕: Heinrich Ⅳ의 참패.
  ④ 1080년, 반대파에 승리한 Heinrich Ⅳ는 Rome에 허수아비 교황을 추대
 ⑹ 교황 Urban Ⅱ(1088-1099).
  ① Gregory Ⅶ 개혁안을 추진.
  ②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함.
 ⑺ 교황 Pascal Ⅱ와 영국왕 Henry Ⅰ: Bec의 Concordat(1106).
  ① 성 안셀모가 추진: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
  ② 주교는 교회내에서 선출.
  ③ 주교로 취임하기 전에 그는 국왕에게 封臣으로서 臣誓(신서, Homage)하고 국왕으로부터 봉토와 이의 관할권을 수여받는다.
  ④ 국왕은 臣誓(신서)를 거부할 수가 있고 주교선출에도 강한 발언권을 행사 - 프랑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타협이 성립.
 ⑻ 교황 Pascal Ⅱ와 독일왕 Heinrich Ⅴ.
  ① Heinrich Ⅴ.
   Ⓐ Rome를 점령.
   Ⓑ 대관식의 사전준비로 서임권 문제해결을 교황에게 강요.
 ② Pascal Ⅱ.
   Ⓐ 영국과 프랑스와의 타협안을 지나친 양보로 간주,
   Ⓑ 보다 철저한 개혁안을 제시.
    a. ‘주교들은 봉토를 포기하고 오직 靈的世界(영적세계) 관장에만 전념하자’고 제안.
    b. 현실적으로 실천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교회안에서도 반대.
 ⑼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 1122): 서임권 문제를 일단락지음.
  ① 교황 Calixtus와 하인리히 Ⅴ간의 협약.
  ②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타협안과 유사.
  ③ 국왕이 주교 선출에 직접 참석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을 첨가.
 

(결) 서임권문제는 타협으로 해결되었지만 주교선출이 종전보다 훨씬 강화된 것만은 틀림없다.

 

1. 교황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⑴ 교회관계사항에서 교황이 기독교세계의 최고권력자임이 널리 인정.
 ⑵ 12세기 이후 교황: 중앙집권적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기구와 법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선다.
2. 정치적 결과.
 ⑴ 중세정치의 한 특성인 二元性(이원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 이원성? 교회와 국가간의 지속적인 대립과 긴장.
 ⑵ 교회와 국가내에서 지배자에 대한 반항권을 내세우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① 영국과 프랑스: 큰문제가 되지 않았다.
   Ⓐ 영국: 왕권이 매우 강하였다.
   Ⓑ 프랑스: 왕권이 너무 약하였다.
  ② 독일: 큰 타격.
   Ⓐ 지방할거주의를 강화.
   Ⓑ 서임권 문제가 발생할 무렵 하인리히 Ⅳ는 지방제후를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수립할 찰나에 있었고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서임권 문제의 발생은 독일의 지방제후에게 왕권에 저항하는 기회를 주었다.
   Ⓓ 이로 인해 독일의 강력한 왕권 수립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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