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rolus(charles)가문에서 온 것.
※ 이 왕조는 Charlemagne에 의해 붙여짐

 

1. 역사적 의의: 봉건제 발전.
 ⑴ 강대한 제국 출현.
 ⑵ 왕권강화: 국왕고권(Regalia).
  ① 국왕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② 제후권력의 기원: 봉건제후의 권력은 여기서 나온다.
  ③ 구심적인 통합성과 원심적인 분열성의 균형.

 

2. 大(대) Pepin.
⑴ 614년, Austria의 궁재가 됨.
⑵ 국왕권력이 약한 것은 틈타 재정과 군사권을 장악.

 

3. 中(중) Pepin.
 ⑴ 687년, Tertry전투에서 Neustrasia 궁재를 물리치고 全(전)Frank의 궁재가 됨.
 ⑵ 전 Frank의 실력자.

 

4. Karl Martel
 ⑴ 717년, 전 Frank의 궁재가 됨.
 ⑵ 이슬람세력의 진출을 배제: Tour-Poitiers 싸움(732).
  ① 기독교세계의 수호자로 칭송됨 .
  ② 이 전쟁의 결과로 Martel이라는 별명을 얻음.
 ⑶ 군제 개혁: 騎士軍(기사군)창설.
  ① 이를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
  ② 이 토지를 기사에게 나눠주고(은대지) 충성을 약속시킴.

 

5. 小(소) Pepin : 왕조건립.
 ⑴ 747년, 전 Frank궁재가 됨.
 ⑵ 751-768년, Frank왕으로 재위.
 ⑶ 751년, 교황 Zacharius가 파견한 Bonifacius 사교의 ‘성별’을 받음.
 ⑷ Karl Martel이 몰수한 토지일부를 교회에 반환하고 남은 토지로 Beneficius을 만듬.
 ⑸ Donation of Pepin(교황령) Langobard가 로마 교황청을 압박하자 로마교황 Stephanus Ⅱ가 Frank로 망명하여 Pepin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Pepin은 Langobard을 격파하였다.
  ① Ravenna 太守領(태수령)을 교황에게 기증: 오늘날의 교황령의 기원.
  ② Stephanus Ⅱ는 Pepin을 왕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Rome의 Patricius로 인정.
  ③ Frank왕과 교황과의 밀접한 관계의 원인
   Ⓐ 교황: 세속의 힘이 필요.
   Ⓑ Frank왕: 권위를 부여받기 위함이다 - 교황의 보호자로 인정받음.

 

6. Charlemagne(Karl 대제: 768-814)
 ⑴ 영토확대.
  ① 전 German을 그의 통치하에 두는 것이 그의 꿈.
  ② 영국과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전 German을 통합.
 ⑵ 서로마제국의 부활: 로마교황 Reo Ⅲ때 로마반란이 일어나자 Reo Ⅲ는 샤를마뉴에게 구원을 요청(799)하였고 샤를마뉴는 800년에 Reo Ⅲ를 복귀시켰다.
  ① 在位(재위, Coronation).
   Ⓐ ReoⅢ가 800년에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준 일.
   Ⓑ 결과적으로 유럽에 황제가 2명이 있게 되었다.
   Ⓒ 12년만에 동로마 황제 Michael Ⅰ가 승인함.
  ② 재위의 의미.
   Ⓐ 로마교황: 동로마황제의 보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샤를마뉴: 異民族(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로마교황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결) 이해와 이권이 일치: 교황과 황제가 200년동안 서로 협조.
  ⑶ 교회에 대한 정책: Theocracy(神政, 신정).
  ① 교회법령(Capituary)의 이름으로 명령.
   Ⓐ Theodosius황제의 후계자로 생각.
   Ⓑ 신으로 부터 왕관을 받았다고 생각.
  ② 종교회의(Synod)를 직접 소집하고 주재.
  ③ 徐任權(서임권)이 샤를마뉴에게 있었다: 교회가 황제에게 복속.
  ④ 교회 고위성직자: 토지를 받았다.
  ⑤ 교회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 교회의 급속한 봉건화를 초래.
 ⑷ 서로마와 같은 강력한 집권체제 형성.
  ① 강력한 친위대를 결성.
  ② 지방관(Count: 伯) 파견.
  ③ 伯(백)밑에 치안판사( Seabin): 사법관리.
  ④ 侯爵(후작, Margrave)파견: 인근 伯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
 ⑸ Carolingian Renaissance
  ① Palace School(왕립학원) 설치.
  ② 성직자들이 많은 학원을 설립: Latin어 교육이 主.
  ③ 지방분권화로 인해 정해진 수도는 없었다.
  ④ 지방분권화로 약해져 있던 Frank왕국은 샤를마뉴 개인 역량으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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