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⑴ 10-11세기에 걸친 유럽사회의 전반적인 안정.
 ⑵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인구증가 등으로 축적된 유럽의 새로운 에너지와 활기.
 ⑶ 이러한 활기와 정력을,
  ① 유럽內(내).
   Ⓐ 개척과 개간사업.
   Ⓑ 엘비 동쪽 지역에 대한 식민운동.
  ② 유럽外(외): 이슬람 세계에 대한 반격.

 

2. 직접적인 계기: 셀주크 투르크가 침입해 오자 Byzantine(비잔틴) 황제가 교황 우르반 Ⅱ에게 구원을 요청.


3. 경과.
 ⑴ 1차 원정: 순수한 종교적 열정.
 ⑵ 2, 3차 원정: 각국의 군주들의 諸權競爭狀態(제권투쟁상태)로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야심.
 ⑶ 4차 원정: 상업상의 이익을 목적.

 

4. 실패 이유.
 ⑴ 왕과 교황간의 이해관계가 같지 않았다.
 ⑵ 수송을 담당하는 해군이 없었다.
 ⑶ 모든 사람이 식민지에 가서 계속적인 식민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5. 의의: 심자군의 결과에 대해 역사가들은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는 성지 회복이라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여 그 결과가 별것이 아니었다는 부정적인 견해에서 십자군이 진행된 200년간에 일어난 유럽의 모든 변화가 모두 십자군의 결과이며 심지어 그것은 근대초부터 진행되는 식민운동의 선구였다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⑴ 중세유럽이 기독교적인 통일체였다는 점과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신앙의 시대였다는 것을 입증한 것.
 ⑵ 유럽세계의 생명력과 팽창력을 증명한 것.
 ⑶ 교황권을 신장시켰는가? 단기적으로는 그러한 결과를 가지고 왔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 정확: 십자군보다는 왕권신장과 왕권중심의 집권적인 통일국가 형성의 추세가 교황권 쇠퇴에 보다 크게 작용.
 ⑷ 왕권신장이나 봉건귀족 쇠퇴와 無關(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문제는 십자군보다는 봉건사회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고려하는 것이 타당.
 ⑸ 지중해 무역의 발달도 이상의 맥락에서 검토하는 것이 옳을런지 모르나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겼던 지중해를 유럽이 회복하는데 십자군이 매우 큰 공헌.
 ⑹ 문화: 이미 코르도바 敎主國(교주국)을 통하여 유럽은 사라센 문화와 접하고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지중해를 통한 평화로운 접촉으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이를 크게 촉진, 시간을 단축시켰다.

 ⑺ Islam(이슬람)세력에 반격을 할때 표출된 유럽의 새로운 활력과 팽창력은 중세유럽의 문화를 발전, 변화시키는 힘과 無關(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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