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5년 2월, 얄타회담
(1)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 "한국인은 자치 능력이 없다. 아마 40년 내지 50년 정도는 신탁통치를 해야 할 것 같다"
(2) 소련 스탈린 : "그렇게 길게는 안 된다. 5년 정도로 하자"
2.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세 나라 외상회의(삼상회의, 미국 영국 소련)
(1) 미국 : 신탁통치 중심의 국제적인 해결방식
(2) 소련 : 임시정부 수립 → 신탁통치
① 임시정부?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ㆍ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소련 입장 : 당시 민중의 지향성으로보아 임정을 수립하는 것이 소련에 유리하다고 판단
3. 한국현대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짜 뉴스인 1945년 12월 27일자(字), 동아일보 기사
(1)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보도
(2)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 :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감정을 자극
4. 우익세력 중심으로 반탁운동(신탁통치 반대) 시작
(1)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경 임정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탁운동을 주도
(2) 미군정
① 오보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를 해명하지 않았다
② 우익세력의 정치적 입김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를 방조
→ 최근 연구 : 오보 기사의 출처는 도쿄의 미육군 극동군사령부와 서울의 주한미군사령부가 관련
(3) 우익 청년단원
① 신탁통치 = 식민통치의 한 방식
②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자 : 반역자이므로 제거해야 한다
③ 암살 표적 :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허헌, 김규식, 안재홍, 배은희, 명제세, 장덕수 등
(4) 1945년 12월 29일, 송진우 암살
① 1945년 12월 29일, 김구 등과 함께 경교장에서 회의
② 찬탁 발언
③ 새벽에 자택에서 한현우 등이 사살
④ 암살 전날 한 발언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5. 정치 지형 변형
(1) 신탁통치 파동 : 1946년 1월 22일자 타스(Tass) 통신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협상 내용을 공개하면서 일시적으로 진화
(2) '민족 대 반민족(친일파)' 대립 구도 → 신탁통치 찬반을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대립 구도
① 남한의 정치지형 : '민주의원'으로 대표되는 우익연합체와 '민족전선'이라는 좌익연합체로 헤쳐 모여
② 좌우 대립과 갈등이 본격화되기 시작
(3) 친일파의 신분 세탁
① 반탁운동이 있기 전 : 민족반역자 = 친일파
②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반탁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자 = 민족반역자
③ 구호 :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협력치 않은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
→ 친일파 : 반탁운동을 계기로 자신들의 과거가 면제되고 오히려 애국자 행세 가능
④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관리, 경찰 출신의 인사들은 반탁운동에 대거 참여
⑤ 반공주의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탁운동 : 소련을 ‘적대화’ 함으로써 과거 친일파의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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