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오류에 위안부 문제 전체 부정하는 건 역사 수정주의자 전형적 언설"
"위안소 설치·관리·통제·이용한 것은 일본군"…일본의 책임 강조

"핵심은 여성이 '성적 노예'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

"강제 연행의 여부 등 여성이 어떻게 왔는지는 부차적인 문제"

1.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中央)대 명예교수

 (1) 1991∼1992년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위안부 동원이나 위안소 설치·관리 등에 일본군이 깊게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 발굴

 (2)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계기를 제공

 (3) 아사히(朝日)신문이 '전쟁 때 제주도에 가서 여성을 강제로 끌고 왔다'는 취지로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2000년 사망)의 발언을 보도

 (4) 2014년 사실이 아니라며 취소

   →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날조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움직임에 문제 본질을 직시하라고 주장 
 (5) "아사히신문이 2014년에 오보라고 한 것은 전시 중 노사조직인 '노무보국회' 회원이던 요시다 세이지 씨의 '군대와 함께 조선(현 한국)의 제주도에서 위안부 사냥을 했다'는 증언에 토대를 둔 보도 뿐"이라며 "일부 잘못을 들어 위안부 문제 전체까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은 역사 수정주의자의 전형적인 언설"이라고 지적

 

 

일본 법무성이 일본군 위안소 운영에 연루된 일본군과 군이 고용한 민간인 등의 재판 기록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1993년 내각관방에 제출한 보고서. 적색 밑줄을 그은 부분에 위협으로 매춘을 강제했다는 내용과 여성을 억류소에서 위안소로 연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 '종군위안부자료집'(1992년)의 해설, 다른 저서 '종군 위안부'(1995년)

 (1)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이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사료로 뒷받침한 저서 : 처음부터 요시다의 발언을 다루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2) 위안부 동원 과정 : 재판 자료나 증언
  ① 군이 선정한 업자가 여성의 친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여성을 위안소에서 사역하는 '인신매매' 

  ② 업자가 술자리에서의 시중 담당이나 간호부와 같은 일 등이라고 속여서 데려가는 '유괴' 

  ③ 관헌이나 업자가 협박이나 폭력으로 강제연행하는 '약취' 등

  ④ 한반도 : 인신매매와 유괴 형태

  ⑤ 중국, 동남아시아 : 관헌에 의해 강제연행

3. 위안소 :  "군이 설치·유지의 주체"

 (1) 1932년 상하이(上海) 사변 이후 설치되기 시작

 (2) 육군의 경우 최초에는 현지 군이 중앙의 승인을 받아 설치

 (3) 1942년부터는 육군성이 스스로 설치

 (4) '업자가 한 것이므로 위안부 문제는 군이나 국가의 책임이 아니다'는 견해에 대해 반박

  ① "군이 위안소 제도를 만들었다"

  ② "관리·통제도 군이 했다"

  ③ "이용한 것도 군인·군속(군무원)뿐이다"

  ④ "여성들도 군이 선정한 업자가 군의 요청을 받고 모집했다"

 

4. 일본 책임이 명확

 (1) 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안소에 들어가기 전에 병참부나 헌병에 의해 오게 된 경위를 조사

 (2) 이 과정에서 군은 인신매매, 유괴, 약취 등의 범죄 행위를 파악했을 것

 (3) 이를 따지지 않고 여성들을 위안소에 구속

5. 본인의 뜻에 따라 위안부가 된 이들이 있느냐?

 (1) 당시 조선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신문에 일본어로 '위안부 모집' 광고가 실린 사례가 있다
 (2) "당시 조선 여성의 문자해독률이 8%(1930년 조선국세조사)였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정의 소녀들이 신문을 읽는 것이 가능했는지 의문"

 (3) "광고는 업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해석 

6. 군 위안부는 "노예 상태"

 (1) 외출 자유 없었다

 (2) 주거지 선택 자유 없었다

 (3) 폐업 자유 없었다

 (4) 병사의 성적 요구를 거부할 자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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