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신석기 시대 :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
⑵ 늦어도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청동기인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
⑶ 기원전 1세기 무렵 ‘소국’(小國)이라는 초기국가 형성
① 변한(弁韓) 12국 중의 하나
② 구체적으로 대구에 맞는 지명은 불명확
⑷ 261년 ‘달벌성’(達伐城) 축조 기사 : 대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최초의 기록
⑸ ‘달구벌’ : ‘큰 언덕, 넓은 평야, 넓은 촌락’을 의미
① 언제부터 대구가 ‘달구벌’로 불렸는지는 불명확
② 신문왕 :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했다.
③ 군현제가 시행되면서 ‘달구화현’(達句火縣) :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良州條)
④ 경덕왕 : 한화정책(漢化政策) 시행으로 같은 의미의 한자식 지명인 대구(大丘)로
⑹ 고려 : 성종(成宗), 12목(牧)에 지방관을 처음 파견
① 신라때 대구현 : 수창군(壽昌郡)의 속현(屬縣) → 고려 : 상주목(尙州牧) 관내 경산부(京山府)의 속현
② 1143년(인종 21) : 현령관(縣令官)이 파견되는 주현(州縣)으로 승격
③ 명칭 : 신라 경덕왕대 처음 쓰여진 대구현(大丘縣)
④ 고려말~조선초 : 대구는 급속히 발전
⑺ 조선
① 1394년(태조 3) : 대구현은 수성, 해안, 하빈현 아래에 영속
② 1419년(세종 1) :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
③ 1466년(세조 12) :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
④ 1601년(선조 34) : 대구도호부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 - 경상도 중심지로
⑤ 성리학이 지배적이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
ⓐ 영조대(英祖代) 이양채(李亮彩)의 상소 : ‘대구(大丘)의 구(丘)가 공자(孔子) 이름 구(丘)와 같아 향교 대성전에서 축문을 읽을 때 공자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되어 좋지 않으니 이를 바꾸자’
ⓑ 영조의 윤허(允許)를 얻지 못하나 구(丘)와 구(邱)를 혼용
ⓒ 정조(正祖) 이후 1850년대경부터 대구(大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