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학(東學)
⑴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한국 근대의 신종교
① 몰락 양반의 후예, 서자
② 1860년 4월 5일, 전통적인 무속에서 신병 체험과 유사한 일종의 강신체험(降神體驗)
③ 한울님의 존재 인정
④ 한울님을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것이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
⑤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도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도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일에 착수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⑥ 교도를 조직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
ⓐ 각 지역의 동학교도를 통솔할 책임자로 ‘접주’(接主) 임명
ⓑ 그 지역을 ‘접소’(接所)
⑵ 세력이 확대되자 정부는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
2.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⑴ 1대 교주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보려는 신원(伸寃)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
① 1890년대,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 시작
② 주장
ⓐ 최제우는 결코 서학의 모리배가 아니다.
ⓑ 그가 펼친 동학은 서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
ⓒ 동학교도의 정당한 종교 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
⑵ 정부의 미온적인 반응
① 남접
ⓐ 강경론
ⓑ 동학을 합법화시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정부를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
② 북접
ⓐ 최시형 중심 : 온건론
ⓑ 현 단계에서 동학이 해야 할 일은 정부한 직접적 공격보다는 지속적인 교세 확장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
3. 교단조직
⑴ 초기에는 별도의 조직이 없었으나 교도가 늘어남에 따라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
⑵ 최제우 당시에는 경주 지역을 관장하는 책임자 : ‘접주’
⑶ 최시형때 교세가 삼남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자 접주 위에 ‘대접주’(大接主) 임명
⑷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 1894) : ‘포’(包)라는 명칭 등장
① 접(接)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② 접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접의 상부조직으로 추정
⑸ 교단의 조직원리 : 연원제(淵源制)
①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는 원칙하에 도를 전하는 자가 도를 받는 자의 연원이 되는 것
② 새로 입교한 자는 자신을 교인으로 인도한 연원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③ 교인을 많이 끌어들인 자는 전체 교단 내에서 포교 성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획득
④ 포교 활동의 활성화 초래
⑤ 연원간의 파벌을 조성하고 경쟁하는 역작용도 발생
4.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1894
⑴ 1894년, 반봉건(反封建), 반제국(反帝國)의 기치하에 조선의 여러 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⑵ 사회경제적 배경
① 19세기 조선
ⓐ 농업 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지주제(地主制) 확대
ⓑ 농촌사회 : 지주, 부농, 소농, 빈농, 임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
ⓒ 지주제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
ⓓ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발생
ⓔ 정부 :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고 시도
ⓕ 개항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 확대
ⓖ 개항 이후 불평등무역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 부농층은 대일 미곡수출(對日米穀輸出)로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
ⓗ 대다수 농민 :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
ⓘ 영세수공업자, 상인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같은 운명
② 농민전쟁의 진원지 : 호남지방
ⓐ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한 지역
ⓑ 강경, 법성포, 줄포, 논산포 등 포구, 개항장 :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
⑶ 1894년 1월, 고부민란
① 동학농민운동은 고부민란(古阜民亂)에서 시작
② 고부지역
ⓐ 지배층의 수탈이 매우 심한 곳
ⓑ 1880년대말경부터 지주제를 확대, 발전
③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 :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을 착취
④ 고부농민 : 1893년 11월경,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 요구 - 거부
ⓐ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 정익서, 김도삼 등 농민지도자들은 봉기 계획
ⓑ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되어 보류
⑤ 전봉준
ⓐ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 - 거부
ⓑ 1894년 1월 9일, 조병갑 : 고부군수로 재부임 - 봉기
⑥ 정부의 민란수습책
ⓐ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 : 유화책
ⓑ 안핵사 이용태 파견,
ⓒ 농민군 해산
⑦ 안핵사 이용태 폭압(暴壓) : 사태 악화
ⓐ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饒戶富民, 토호층과 소빈민층의 중간적 형태)을 잡아서 난의 주모자로 처벌
ⓑ 봉기한 농민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
⑷ 1차 농민전쟁
① 전봉준
ⓐ 무장(茂長)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 조직
ⓑ 3월 25일, ‘호남창의대장소’ 조직 : 농민군 정비
②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
③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 격파
④ 4월 27일, 전주성 입성
⑸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① 정부 : 4월 29일, 청에 원병 - 청군과 일본군이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옴
② 농민군 :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 제시
③ 정부가 이에 응하여 5월 7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
ⓐ 농민군 :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진전을 지켜보기로
ⓑ 정부의 폐정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음
④ 농민군 :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
ⓐ 지방통치의 실권 장악
ⓑ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음
ⓒ 삼정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
ⓓ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
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
ⓐ 양반유생과 이서층도 참가 : 군사 활동
ⓑ 충청도의 동조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
ⓒ 반제·반봉건 전쟁을 준비
ⓓ 경기도 죽산 안성, 경상도 하동 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이 봉기
⑹ 2차 농민전쟁
①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 :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시도
② 농민군 지도부 :재봉기 확정
③ 전봉준
ⓐ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
ⓑ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
ⓒ 1차 봉기때 반대하던 북접세력(최시형)을 설득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
④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
⑤ 관군과 일본군에 패퇴
⑺ 역사적 의의
①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
②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
③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
ⓐ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 제거
ⓑ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하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
④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감 : 특히 2차 농민전쟁
ⓐ 탐관오리의 제거
ⓑ 민씨정권 타도와 봉건적 폐단 시정
ⓒ 봉건제도 폐지
ⓓ 친일정권 타도
ⓔ 식민지화의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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