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희강왕(僖康王, 836~838 재위)
ⓐ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 : 아들 김우징(金祐徵), 여동생의 사위(金禮徵),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 등의 후원으로 왕을 칭함
ⓑ 집사부(執事部) 시중(侍中) 김명(金明) : 아찬(阿湌) 이홍(利弘), 배휜백(裵萱伯) 등과 함께 매부인 김제륭(金悌隆) 추대
ⓒ 두 세력이 경주에서 시가전 → 김균정 살해 → 김제륭, 희강왕 즉위 → 정치적 압박으로 자살
② 실세였던 김명 → 민애왕(閔哀王, 838~839 재위) 즉위
③ 김우징, 김양 : 해상 세력가인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장보고와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고 군사적인 후원을 받음
④ 달구벌 전투에서 김양 승리 : 김우징이 신무왕(神武王, 839 재위)으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 제공
⑤ 경주 서쪽 교외 월유택(月遊宅=이궁(離宮))까지 진격, 그 곳에 피신한 민애왕 살해
⑥ 민애왕이 대구 지역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
ⓐ 교통로상에 위치한 요지
ⓑ 경주 방어를 위한 외곽 요충지
ⓒ 동화사(桐華寺) : 민애왕의 원당 사찰(願堂寺刹)
ⓓ 동화사 : 헌덕왕(憲德王) 아들이며 민애왕과는 사촌인 심지(心地) 대사가 중창(重創) - 민애왕 아버지, 헌덕왕 동생 상대등 김충공(金忠恭) 부부의 후원이 컸다.
ⓔ 동화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의 사원세력의 지원도 기대하였는 듯
[출처] 민애왕과 신무왕의 달구벌 전투|작성자 대구 역사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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