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되어 해마다 토산물을 바쳐왔다’

⑵ 우산국 : 독도를 포함해 울릉도 주변의 작은 섬

 ① 일개 부족국가

 ② 삼국시대의 유물인 고배(高杯)가 발굴 : 이곳의 선(先)주민은 신라계라기 보다는 동해안 지방으로 이주해왔던 고구려계 사람으로 추측되고 그 역사도 매우 오래된 듯

 ③ 반어·반농민(半漁半農民)집단 생활

 ④ 내륙보다는 낮은 문화 수준

 ⑤ 신라 사람과 언어가 통하고 왕래도 있은 듯 : 본토에서 군선(軍船)이 접근하면 가파른 산정으로 피해 군복(歸服)을 거부하며 거주

⑶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 <열전> 이사부조 - ‘우산국’(오늘날 울릉도, 독도)에 대한 기록

 ① 신라 이사부(異斯夫) :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로 있으면서 우산국을 신라에 귀속

 ②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으로 추정

 ③ 이후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에는 신라 문화가 계속 유입

 ④ 일본 주장 : 우산국이 울릉도라 하더라도 독도는 우산국의 관할지가 아니다.

  ∴ 울릉도에서 발굴, 출토된 유적, 유물 ①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고 ②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⑷ 『고려사』(高麗史) : 여러 곳에 독도가 우산국 영역에 속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① 태조 왕건 : 우산국을 대표하여 백길(白吉), 토두(土豆)가 내헌하자 고려 왕실에서는 정조(正朝), 정위(正位)의 관위를 수여, 신라에 귀속되었던 울릉도가 고려에 그대로 복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② 현종 9년 11월, 동북여진이 우산국에 침입해 농사에 큰 피해를 입혀 고려 관리 이원로(李元魯)로 하여금 농기구를 보내게 했다.

 ③ 현종 13년 7월, 약탈이 거듭되어 우산국 백성이 본토로 피난해오자 명주(溟州) 관리가 양식을 주어 이들을 편호(編戶)하였다.

 ④ 인종 19년, 명주의 관리가 본토에서 볼 수 없는 특산물을 구입, 임금께 올린 기록이 있어 울릉도가 고려의 관할하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⑤ 성종 : 지방제도를 군현제화(郡縣制化)하여 우산국도 고려의 한 주현(州縣)으로 속하게 되었다.

 ⑥ 의종 11년, ‘동해 가운데 울릉도가 있어 주현을 설치한 때도 있었다고 하여 백성을 옮겨살게 하고자 김유립(金柔立)을 파견 조사하였더니 돌아와 복명하기를 암석이 많아 사민(徙民)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하여 중지하였다’

 ⑦ 『고려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31, 여지고 19 우산도 울릉도조, 고종 30년, 최이(崔怡), ‘이 섬의 토양이 비옥하고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을 옮겨살도록 하였으나 풍란으로 인해 도중에 배가 전복되어 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되돌아왔다.’

 ⑧ 부원배였던 이추(李樞)가 울릉도에서 많은 진귀한 물산이 산출되고 있다고 원나라 조정에 알려 원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울릉도 토산품을 헌납하라고 요구

 ⑨ 『고려사』권5 세가 덕종 원년 11월 병자조, 우산국이란 국명 대신 우릉(羽陵) 성주라는 호칭으로 불림

 ⑩ 덕종 원년 11월, 우릉 성주가 그 아들 부어내다랑(夫於乃多郞)을 보내어 고려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

  ∴ 울릉도, 독도를 우산국이라 부르던 호칭은 종지부를 찍는데 이는 우산국이 고려 조정의 지배하에 완벽하고 속하였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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