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주장 : 발해는?

 (1) 당나라의 지방정권

 (2) 중국사의 일부

 (3)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서에 근거

  ①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다

  ② 당의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로 왕이 도독 등의 책봉을 받았다 
 (4) 당나라에 끊임없이 조공했던 기미주(羈縻州)의 관계

 (5) 문화적으로 한자 사용 : 당 중심의 문화를 향유한 왕조

2. 발해의 국호와 책봉관계 : 중국이 자의적으로 해석
 (1) 발해가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았다고 해서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견강부회

  ① 신당서에 ‘말갈(靺鞨)’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에 근거 : 발해라는 국호를 당에서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 
 ② 개국 때부터 ‘진국’ 또는 ‘발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③ '말갈’이라고 낮춰 부르는 이름을 국호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

 ④ 말갈에서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부른 것 : 당나라의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일방적 외교행위이지, 당이 발해라는 국호를 내린 것은 아니다. 

  ※ 이후에도 당은 자주 발해를 말갈로 낮춰 불렀다
 (2) 발해가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 되는 것은 아니다

  ① 대조영을 비롯해 많은 발해의 왕들이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건 사실

  ② 동아시아에서 발해,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에 대한 당의 책봉 행위 : 속국이나 지방정권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③ 책봉 : 양국간의 ‘외교적 승인행위’
 (3) 조공

  ① 동아시아의 관영무역 차원에서 보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학계의 정설

  ② 주변국들이 단지 당으로부터 경제ㆍ문화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무역과 외교행위
  ③ 발해는 당 문화를 조공사를 파견해 적극적으로 수용

 → 중앙과 지방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왕조 대 왕조로 이루어진 국제적 외교행위 

3. 독자 연호 사용, 종족도 고구려 계통
 (1) 발해 : 독자적으로 연호나 시호(諡號)를 사용

  ① 《신당서》 : ‘사사롭다(私)’고 표현

  ②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

  ③ 일본과의 관계 : 발해국 내지 고구려의 '고려국'
  ④ 예맥, 부여계통의 고구려인[속말말갈, 백산말갈]

 (2) 말갈

  ① 당시 동북방 이민족

  ② 고구려 변방민에 대한 범칭이자 비칭

  ③ 《구당서》 : 발해국의 종족계통을 말하고 있는 자료

  ④ 《신당서》 : 출신지역을 속말수인 송화강 지역으로 보는 사료
 (3) 발해인은 고구려어 사용

  ① 언어에 대한 자료는 없는 상황

  ②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는 《구당서》 기록을 통해 짐작이 가능

  ③ 옮겨 사는 종족이 아니었기에 풍속이 같다는 기록을 언어도 같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
 (4) 문화

  ① 석실묘와 석곽묘를 사용하던 고구려 지배층의 고분 축조

  ② 고구려인이 사용하던 온돌을 사용

   →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서 발해인들이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 

4. 한국인 : 고구려ㆍ발해 계승 뚜렷
 (1) 세계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왕손을 자처하는 후손들이 한국에만 있다

  ① 고구려 왕손 : 횡성(橫城) 고씨(高氏)

  ② 발해 왕손 : 협계(陜溪) 태씨(太氏), 영순 (永順) 태씨

 (2) 발해 유적 옆에는 중국의 조선족이나 러시아의 고려인 부락 존재
 (3) 연변조선족자치주

  ① 발해가 건국 초기의 수도, 지린(吉林)성 둔화(敦化) 지역 : 발해 첫 수도였던 구국(舊國)

  ② 허룽(和龍)시의 서고촌 : 중경현덕부인 서고성과 정효공주묘

  ③ 훈춘(琿春) 지방 : 동경용원부로 알려진 팔련성터 등의 유적이 산재
 (4)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발해진 : 향수촌과 강서촌이 있는데 여기에도 대부분 조선족이 거주 
 (5) 발해 솔빈부로 여겨지는 우수리스크 지역 : 고려인이 집단으로 거주

 

  ※ 19세기말에 이주해 간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일부러 찾아갔을 리 없다. 삶의 터를 찾다 보니,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살던 곳에 머물게 되었던 것

 

출처 : 한국일보 2004년 4월 5일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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