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이 고구려를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근거의 하나 :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책봉(冊封)―조공(朝貢) 관계

 (1) 중국의 여러 역사서

  ① 중화관(中華觀)에 입각

  ②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보고 양국의 외교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으로 기술

  ③ 중국쪽 역사 기록의 조공과 책봉 기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복속국

 (2)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했기 때문에 중국 영토 안에서 시작한 셈

 (3) 건국 직후부터 시종일관 한(漢)에 귀속했다고 강조

 (4) 책봉제가 강화되는 시기

  ① 중국의 남북조시대(420∼589)

  ② 고구려 : 4세기 이후에도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았다

  ③ 고구려왕 : 중원 정권의 관리로 고구려인을 다스린 증거
 (5) 북위(北魏)가 수여한 '동이교위(東夷校尉)'라는 책봉호

  ① 고구려가 중원 정권을 대표해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민족을 관할한 것으로 파악

  ② 고구려는 매년 북위에 조공해 신하의 예를 다했다

 (6) 고구려 : 남북조시대에 중원 국가들과 큰 충돌이 없었다

  ① 우호교류를 추구한 중원 왕조의 개명(開明)한 정책 때문

  ②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대한 신하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 

2. 고구려 : 중국 군현과 갈등하며 발전
 (1) 조공-책봉의 역사적 실상 : 중국 내부에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사이에 형성된 정치 질서 → 국가간의 외교 형식으로 발전 
 (2) 후한대에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 : 대결 관계

  ① 현도군에 소속된 제후국이 아니라, 현도군과 대결하며 건국하고 발전

  ② 고구려의 중심부에 있던 제 1 현도군이 흥경의 제 2 현도군으로 다시 무순지역의 제 3 현도군으로 밀려나는 과정 자체가 곧 초기 고구려의 성장과 맞물려 있는 것

  ③ 고구려 : 현도군과 요동군에 계속 공세적 입장

  ④ 242년, 고구려 : 요동과 낙랑군을 잇는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 → 지금 베이징(北京) 인근 지역을 관할하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침공
 (3) 고구려 발전에 획기적인 기반이 마련된 한반도 서북부의 장악 : 313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면서 이루어진 것

 (4) 중국의 5호16국 시대때 고구려 :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나라인 전연(前燕) 및 후연(後燕)과 대립, 요동·부여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공방

 

  ※ 고구려와 중국 군현의 관계는 화평관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긴장 관계 

3. 조공 기록은 실제는 국가간 외교행위
 (1) 중국 학자 : 조공-책봉제가 확대되는 남북조시기는 조공-책봉 관계가 강화되는 시기

 (2) 종속관계가 아니라 주변 국가와 중국의 여러 왕조 사이에 맺은 외교 관계의 한 형식

  ① 중국 세력이 분열되어 주변 국가에 대한 규제력이 약화된 상황이기 때문

  ②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조공' : 실제 조공과는 관계없는 외교적 행위를 '조공'으로 많이 표현

  ③ 조공-책봉 관계가 확대된 것 :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힘으로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 
 (3) 고구려 :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① 남조 국가와도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구사

  ② 북위를 위협하는 북방의 유목국가와도 독자적으로 교섭 지속

   → 다원적인 국제 질서를 움직여가는 중심 축의 하나 
 (4) 고구려와 북위 관계는 우호적으로 전개

  ① 양국의 교섭 횟수를 보면 추측 가능

  ② 갈등과 충돌의 계기도 많았다 : 북위가 고구려에게 기대하는 신하의 태도와 고구려가 북위에게 취하는 독자성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생기면서 빚어진 갈등

 

  ※ 조공-책봉은 중원의 왕조가 요구하는 명분상의 신속(臣屬) 관계일 뿐 고구려는 실질에서 독자성을 갖는 국가 체제라는 자각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던 것 

4. 중국, 고구려 독자 세력권 인정
 (1) 북중국 왕조 : 책봉호를 통해 고구려의 독자성 인정

  ① 고구려가 받은 책봉호가 사상 최고위인 예가 많았던 것

  ② 동방 사회에 대한 대외 업무를 관장하던 관직인 '동이교위'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郞將)'을 부여한 점

  ③ 동북방에서는 고구려 외에는 어떤 국가나 정치 집단에게도 책봉을 하지 않은 사실 등
 (2) 조공-책봉제 :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적용된 외교 형식

  ① 이를 근거로 유독 고구려만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

  ② 백제, 신라, 왜가 중국의 왕조와 맺고 있는 조공-책봉 관계 = 고구려가 맺고 있는 조공-책봉 관계

   → 조공-책봉이란 형식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 된다면 백제, 신라, 왜 역시 중국의 지방 정권이 되어야 할 것 
 (3) 고구려 :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 집단을 포함했으며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갖고 있었다

  ① 조공-책봉 관계 : 이념적으로 중화 질서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런 중국 중심의 이념은 고구려가 갖고 있던 천하관과 충돌할 개연성이 크다

  ② 독자적 세력권을 설정해 신라와 백제 등에 조공 관계를 설정 : 중국의 조공-책봉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중원 왕조에 복속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4) 수와 당이 고구려에 요구한 조공-책봉 관계

  ① 양국은 고구려에 실질적인 신속을 요구

  ② 고구려가 이를 거부

  ③ 중국 중심의 중화적 질서를 무력으로 실현코자 시도 → 고구려와 수·당이 끊임없이 전쟁

5. 남북조시대 책봉 유형
 (1) 중국 왕조가 일방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다

 (2) 책봉 받는 국가의 요구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 백제와 왜(倭) 

 (3) 백제

  ① 남조와 교류하면서 왕은 물론 왕족이나 신하의 관작까지 책봉해 줄 것을 자주 요청

  ② 백제왕이 신하에게 관작을 주고 이를 남조에 인정해주도록 요구하는 방식

 (4) 왜

  ① 남조 송에 조공하면서 책봉호를 호화스럽게 만들어 이를 인정해 주도록 요구

  ② 왜왕 : 스스로 칭한 책봉호에 백제와 신라, 가야 등 이웃나라를 마치 자신이 다스리는 것처럼 과장하여 관작(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을 요청 → 송이 이를 무시 → 왜국왕만 인정하는 일 발생

 

  ※ 남북조 시대의 책봉은 책봉 받는 나라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고, 나라마다 그 모습도 여러 가지여서 실제로 지배하고 복속하는 관계라기보다 외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자세히 보려면 여기 클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