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1904년, 고등 통역관 대우로 러일전쟁 참여

② 1905년 7월, ‘대구구락부’ 형성 : 일본식 이름 야마모토(山本信) 사용

③ 1906년 5월,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로 부임 : 정부 허락없이 대구읍성 철거

④ 1907년 평남관찰사 → 1908년 6월 경북관찰사 → 1910년, 충청남도 도장관 → 1915년, 충추원 참의 → 1921년, 황해도 지사 → 1923년, 충청북도 지사 → 1937년,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 1941년, 중추원고문 → 1943년, 중추원 부의장 →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貴族院 勅任議員)

⑤ 1909년 1월 7일, 11일, 황제접대위원회 구성 : ‘일장기를 지참하지 않는 학교는 폐쇄하겠다’

⑥ 1919년 3.1운동 : ‘경거망동으로 국민의 품위를 손상하게 하는 이가 없도록 상호 자제할 것’을 주장하며 자제단(自制團) 조직, 단장

⑦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 의해 수감

ⓐ 수감 8~9일만에 폐렴을 이유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

ⓑ 1949년 반민특위 해산 : 처벌 무산

⑧ 『술회』: 반민특위에 체포, 구금된 상태에서 일기 형식으로 그가 직접 작성

ⓐ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사람”

ⓑ “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적 위인” : 이토의 양자(養子)

ⓒ 일본인도 그를 ‘야마모토 군수’ : 일제 정책을 찬양하였고 조선과 조선인의 단점을 터무니 없는 논리로 서술

⑨ ‘박작대기’ : 말년을 침산동에서 거주했는데 경찰, 관리들이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때리기 일쑤

⑩ 침산동주변 많은 노인들이 그를 ‘영웅호걸’로 기억하고 있고 일소대(一笑臺)에 날마다 치성을 드릴 정도로 그에 대한 인식은 많이 왜곡되어있다.       

 일소대? 1943년, 자신의 기개를 알리기 위해 친지의 도움으로 세운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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