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서상돈(徐相燉)이 제창하였고 일제가 침략정책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강제로 제공된 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대구에서 1907년 1월 29일 시작된 실력양성운동 계열의 민족운동
②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조직 : 임원은 전직 관료, 유생이나 주도층은 상인
③ 민의소(民議所) 조직 :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 유도
④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 설치
⑤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등에 보도되면서 전국으로 확산
ⓐ 1907년 2월 22일,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결성
ⓑ 1907년 2월 26일, 국채보상중앙의무사(國債報償中央義務社) 결성
⑥ 통일기구 설치 : 실질적인 통일기구 역할 수행 못함
ⓐ 1907년 4월 8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설립
ⓑ 일반 민중을 지도하기 위해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설립
⑦ 1907년 2월 23일,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址婦人會) :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여성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
⑧ 1907년 6월, 대구 남산국채보상부인회 발족
⑨ 1907년말을 전후해 크게 쇠퇴
ⓐ 일제 탄압, 이간 책동
ⓑ 대한자강회 해산 : 핵심 단체
ⓒ 국채보상기성회 총무였던 오영근의 보상금 횡령 혐의사건
ⓓ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을 역임한 김종한 : 친일단체인 일진회 가입
ⓔ 운동 주체의 취약성으로 일부 지도자의 동요
⑩ ‘국채보상금 비소사건’(費消事件) 조작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추진은 사실상 종식
⑪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동인동 옛 대구여중고), 국채보상운동기념비(대구시민회관 앞)
⑫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
ⓐ 담배를 끊고 모은 돈으로 과연 외채를 다 갚을 수 있는가?
ⓑ 외채를 갚는데 왜 일반 국민이 나서야 하는가?
ⓒ 외채를 갚기만 하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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